Y-Review

나는 이미 거기에 없으니 : 루시드폴 『Lucid Fall』

루시드폴 (Lucid Fall) 『Lucid Fall』
1,367 /
음악 정보
발표시기 2001.02
Volume 1
장르 포크
레이블 라디오뮤직
유통사 드림비트
공식사이트 [Click]
이 앨범은 루시드폴의 앨범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루시드폴은 『버스, 정류장 OST』(2002) 에서 『오, 사랑』(2005) 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 태어났다. 이 앨범은 그저 ‘미선이’라는 이름을 홀로 감당할 수 없었던 조윤석이 미선이 때부터 협력한 엔지니어인 고기모와 더불어 만든 ‘프로젝트’ 앨범이었다. 

이를 간과할 때 오류를 범한다. 지금의 루시드 폴은 이 앨범을 다시 만들 수 없다. 적어도 이 앨범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다. 분노와 서정이 제 나름대로의 합일을 이룬 (혹은 이뤘다고 생각한) 『Les Misérables』(2009) 이후의 루시드 폴은 과 「Take 1」같은 실패작을 다시는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Take 1」이 실패작이 아니라고 변호할 생각은 없다. 「Take 1」은 「새 : Band」에서 「새 : Acoustic」로 끝나는 일순(一巡)의 흐름을 말 그대로 처참하게 부순다. 특유의 정제되고 절제된 언어들이 이 곡 이후로 마침내 탈락한다. 지난 일을 회상하기엔 ‘쓰레기 같은 삶’이 너무 많다는 뜻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때의 조윤석은 아름다운 노래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세상」(1998), 「치질」(1998) 처럼 「Take 1」 같은 곡들도 거침없이 쓰는 울뚝불뚝한 성미의 싱어송라이터였다. 미선이의 이름으로 발표된 『Drifting』(1998)에서 튀어나온 서정이 개 같이 곪은 세상을 저주하다 우연히 튀어 나온 것이라면, 이 앨범은 서정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곰삭은 자리마저도 기어이 다룬다. 곪은 자리는 결국 검은 피를 터트리기 마련이다. 「두 번째 세상」과 「Take 1」은 바로 그런 곡들이다. 「Drifting (inst.)」(1998) 의 피아노가 더욱 서정적으로 들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가 더욱 간절하게 들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비슷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낸 일종의 체념이 거기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다. 이 앨범은 『Drifting』의 ‘시간’을 하류, 숲, 풍경, 바다 등의 ‘공간’으로 치환하며 다시 거듭하는 앨범이다. 이 앨범 전반부의 완벽한 여정은 기실 ‘미선이’로 보낸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이었는지를 공간적으로 다시금 증명한다. 「은행나무 숲」의 풍부한 뉘앙스, ‘ㅅ’의 음가를 서늘하게 배치한 「새」의 첫 부분, 「나의 하류를 지나」에서 불현듯 등장하는 상승음, 미선이라는 열병이 남기고 간 상처들을 보여준다. 이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풍경은 언제나」의 후반부에 장난스럽게 등장하는 전자음이나, 「해바라기」의 몽환적인 이미지마저도 진지한 뉘앙스를 얻을 정도다.

그러나 이 앨범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미선이가 미처 다루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마저도 조탁하여 뼈만 남긴다. 상투적인 문구가 풍자적인 뉘앙스로 작용한 미선이의 그것에 비해 이 앨범의 가사는 상투적인 구마저도 용납하지 않는다. "풍경은 언제나/ 제자리 아무리 달려도 그대로네" (「풍경은 언제나」) 라는 추상적인 성격의 가사나, "모든 게 우릴 헤어지게" (「나의 하류를 지나 」) 한다는 지극한 독설 그리고 "가을처럼 슬픈 겨울" (「너는 내 마음속에 남아」) 와 같은 차가운 비유는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미처 듣지 못한 영역의 긴장감을 잔뜩 품고 있다. 미선이의 「두 번째 세상」은 앨범 전체에 흐르는 풍자적인 뉘앙스 덕분에 간신히 탈락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앨범은 그렇지 못했다. 이 앨범의 깨질 듯이 시린 언어는 「Take 1」 앞에서 결국 힘을 잃는다.

그래서 「Take 1」의 뒤에 있는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이 더욱 애처롭게 들린다. 조윤석은 이 곡에 끝내 언어를 입힐 수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렇기에 오롯하게 나일론 기타의 연주만 남겼다. 언어는 없지만, 「Take 1」의 이전 곡들과 같은 선상에 이 곡을 놓은 것이다.

너무나 간결한 선택이었지만, 나는 바로 이 지점 덕분에 이 앨범이 오롯한 ‘앨범’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Drifting』으로 자꾸만 회귀하던 (한 번은 가사가 있는 곡으로, 또 한 번은 가사가 없는 연주곡으로) 미선이의 결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음악적 연속성을 지닌 화두를 남겼기 때문이다.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는 데도 왜 발들이 필요한지’를 묻는 긴 제목에서 우리는 언어를 붙일 수 없었던 미련과 언어를 붙일 수 없다는 결심이 한데 얽힌 조윤석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조탁한 언어라는 장치마저도 깨트린 채, 결국 음악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고백을 그는 언어 없는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Outro」의 아르페지오가 가볍게 앨범 전체의 감성을 떠받치지만, 결기마저 느껴지는 여운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조윤석은 이렇게 ‘미선이’라는 열병을 치열하고 철저하게 다시 앓으며, ‘루시드폴’의 세계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그저 고립에 헌신하며 아픔을 속삭이는 데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서정이 그와 더불어 자라났다. 다시 태어난 그는 지금 이제 이 자리로 오지 않지만, 여전히 그가 있었던 하늘 만큼은 시리도록 아름답다. 어쩌겠는가. 이 앨범이 헤매고 있는 자리를 다시금 헤메는 수 밖에. 이미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주저앉은 채, 시리도록 맑은 하늘이나 쳐다보는 수 밖에.

Track List

  • No
    곡명
    작사
    작곡
    편곡
  • 1
    새 : Band
    조윤석
    조윤석
    조윤석, 고기모
  • 2
    풍경은 언제나
    조윤석
    조윤석
    조윤석
  • 3
    나의 하류를 지나
    조윤석
    조윤석
    조윤석
  • 4
    은행나무 숲
    조윤석
    조윤석
    조윤석, 김정현
  • 5
    너는 내 마음 속에 남아
    조윤석
    조윤석
    조윤석
  • 6
    해바라기
    조윤석
    조윤석
    조윤석
  • 7
    새 : Acoustic
    조윤석
    조윤석
    조윤석
  • 8
    Take 1
    김정찬
    조윤석
    김정찬, 조윤석
  • 9
    Why do I need feet when I have wings to fly? (inst.)
    -
    조윤석
    조윤석
  • 10
    Outro (inst.)
    -
    조윤석
    조윤석

Editor

  • About 김병우 ( 64 Article )
SNS 페이스북 트위터
TOP
Error Message : Query was emp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