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Review

80년대라는 꿈의 시대 : 나미 『Nami Vol.4』

나미 『Nami Vol.4』
932 /
음악 정보
발표시기 1985.05
Volume 4
장르
유통사 태양음향
(편집자 註. 본 글은 동두천생활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한 사람을 위한 인문학》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문은 동두천생활문화센터 블로그 [https://blog.naver.com/ddcliving]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저평가된 뮤지션

1980년대 최고의 가수로 방송국에서 선정하는 10대 가수에 빈번히 오르고 (5주 연속 1위하면 주는) 가요톱텐 골든컵도 받았는데 무슨 저평가냐고 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미에게 합당할 평가는 조용필이나 서태지와 아이들, 신해철, 나훈아를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그런 중량감을 말한다. '댄스가수' 나미로만 바라보는 것은 실체를 축소하는 것이다. 댄스가수가 문제가 아니라 댄스가수를 인식하는 수준을 말하는 거다.


한국 쇼비즈니스의 어떤 정점

잠깐 영욕의 한국 쇼비지니스를 생각해보자. 모던걸, 모던보이들이 활동하던 1930년대 대중문화가 처음 탄생한 이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만난 미군문화(GI culture)는 한국 대중문화를 점령했다. 그 이후로 한국 대중문화는 커다란 전범에 대한 이식과 나름대로의 독립이 교차하는 역사였다. 많은 뮤지션들이 오갔고 많은 경향들이 교차했다. 나미가 활동했던 1980년대는 어느 부분에서 가장 화려했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5공화국 경제성장의 활력은 사회적 아픔과는 별개로 총천연색 광채를 뿜어냈다. 악극단의 천막은 강변 호텔 나이트클럽의 화려한 조명으로 바뀌었고 선망의 대상이던 8군쇼의 영향은 화려한 TV쇼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나는 1980년대를 생각하면 나미의 화려한 스타일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 당장 유투브를 검색해보면 알 것이다. 단 한 번도 획기적이지 않은 의상이 없다. 나는 나미를 전통적 한국 쇼비즈니스의 어떤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무대는 완벽해야 한다는 쇼비즈니스의 명제는 지금 아이돌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하지만 나미는 지금 아이돌이 가지지 못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 이식된 음악과 스타일을 누구와도 같지 않게 펼쳐내는 창의적 독립이라고 할까? 디자이너 지춘희의 오리지널리티, 당대 최고의 세션들, 이질적이지 않게 녹여낸 다양한 장르, 그리고 이것들을 모두 소화해낸 천부적 재능. 나미는 1980년대라는 꿈의 시대를 정확하게 지칭하는 상징이었다.


나미의 정점, 4집

1980년대 주류 음반산업에서 앨범의 구성이나 완성도는 종종 폄하되었다. 나미 역시 앨범 중심으로 가치평가한다면 들쭉날쭉한 편이다. 그러나 1985년 발표된 이 앨범만은 그렇지 않다. 완벽한 한국식 소울, 훵키, 뉴웨이브 댄스 음악의 정점을 들려준다. 대표곡인 「슬픈 인연」이 그저 덤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 앨범은 사실 프로듀서이자 편곡자, 키보디스트인 김명곤의 앨범이기도 하다. 사랑과평화의 핵심멤버에서 「빙글빙글」(1984)을 통해 프로듀서로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자신의 음악적 욕심을 이 앨범에 쏟아부었다. 나미 4집을 거칠게 정의하자면 나미가 가진 “코스모폴리탄 엔터테이닝 그루브”와 김명곤이 가진 “로컬 지니어스 멜로디어스 훵크”의 결합물이다. 둘의 시너지는 신시사이저로 얼개를 짜는 댄스곡 「유혹하지 말아요」와 「우리 잠시 떠나요」에서 폭발한다. 「첫 포옹」과 「슬픈 인연」의 깊은 서정도 특별하다. 최이철(사랑과평화)의 록킹한 기타연주가 돋보이는 「나비」는 호쾌하고, 째깍거리는 훵키 기타로 표현된 「보이네」는 달콤하다. 한국 소울·훵크의 인증서와도 같은 「허수아비」는 김명곤의 화려한 편곡 스킬로 기념비적인 레코딩이 되었다. 80년대 한국 음악 씬에서 록과 포크의 백인적 신화만 지워낸다면 당연히 최고의 앨범으로 등극해야 한다.


천부적 재능

이 앨범은 분명히 Madonna와 Cyndi Lauper의 영향이 느껴진다. 하지만 당대의 어떤 음악과도 다른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를 맞이하면서 발표한 「인디언 인형처럼」 (1989) 또한 Janet Jackson과 Paula Abdul의 영향이 느껴지나 무대에서는 오로지 나미만 보인다. 이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오리지널리티라고 할텐데, 과연 이것은 어디에서 유래한걸까?

나미는 1973년부터 1978년까지 10대 시절 절반 해피돌스라는 그룹의 일원으로 미국 전역에서 공연했다. 나미의 자연스러운 소울·훵크 바이브는 여기서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지만 한국 대중문화는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 학습은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단순한 모방, 이식이 아닌 나미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설명해주지 못한다.

나미는 1957년 동두천에서 태어났다. 동두천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서울로 이사가기 전까지 동두천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보산동에서 레코드 가게를 운영했는데 어린 나미는 당시 보산동 길거리를 걷는 미군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미군 연예 비즈니스 담당자들이 찾아와 어린 나이부터 미8군 쇼에 출연하게 되면서 커리어가 만들어졌다.

나미만의 독창성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신이 내린 재능을 열심히 발현한 정도만 알겠다. 단지 나는 그 재능이 동두천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미군이라는 자원, 보산동이라는 특수성이 재능과 만난 것이다. 그렇다고 동두천이나 보산동이 나미를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나미가 동두천 출신이 아니었다면 나미의 천부적 재능은 다른 식으로 발현되지 않았을까. 지금처럼 미국 대중음악의 이식과 독립의 역사에서 독립의 큰 성취로 받아들여지는데 까지는 도달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지금 동두천과 나미를 연결하는 작업은 나비보다 동두천에게 더 필요해 보인다.



 
《Playlist》
 

찬란한 머릿결 : 「유혹하지 말아요」 (1985) 
스무살의 찬란한 나미 : 「영원한 친구」 (1980)
세련된, 그리고 묘한 뉴웨이브 「사랑이란 묘한거야」 (1987)
나미와 붐붐, 리믹스의 시작 : 「인디언 인형처럼」 (1989)

Track List

  • No
    곡명
    작사
    작곡
    편곡
  • 1
    유혹하지 말아요
    김명곤, 김순곤
    김명곤
    김명곤
  • 2
    슬픈 인연
    박건호
    김명곤
    김명곤
  • 3
    우리 잠시 떠나요
    김명곤
    김명곤
    김명곤
  • 4
    님의 계절
    김명곤
    김명곤
    김명곤
  • 5
    첫 포옹
    김명곤
    김명곤
    김명곤
  • 6
    보이네
    김명곤
    김명곤
    김명곤
  • 7
    나비
    하덕규
    최이철
    김명곤
  • 8
    빗길
    최이철
    최이철
    김명곤
  • 9
    허수아비
    손학례
    손학례
    김명곤
  • 10
    당신은
    김명곤
    김명곤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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