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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魔王 #25] 90년대 세대, 끝나지 않은 우리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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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일병이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살고 싶으냐.”
“돈 못 벌어도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아하. 너란 놈을 이제 알겠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자라서 무조건 성공할거다. 미친듯이 돈 벌어서 떵떵거리며 살거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가 성공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때의, 짧은 머리에 거친 인상을 한 그가 결코 속물같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고고히 혼자 세상을 내려다 보던 나의 마음 한켠 어딘가를 송곳으로 깊숙히 찔린 마냥 고개를 푹 떨굴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세상'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곳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당연하게도 아니었다.


90년대 세대 - 1987년 정치적 민주화와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상징되는 호황으로 시작하여, 1997년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온 IMF까지의 시기에 성장한 세대들. 그들은 그 이전의 386이나 민주화세대, 그리고 그 이후의 IMF 혹은 88만원 세대와는 다르게 딱히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단 하나, 당시에는 'X세대'라는 젊은 소비층들을 겨냥한 수입된 광고 카피만이 그들의 이름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대에는 또 다시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와 《건축학개론》과 같은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문화상품의 소비층으로서 호출되었다.



삐삐로 호출된 세대

80년대가 항상 모종의 사건들로 트라우마화되어 있다면, 90년대는 그때나 지금이나 종종 소비주의 세대들의 유사-해방된 공간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들은 80년대의 비장미어린 투사들과도 다르고, 2000년대 이후의 패배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세대와도 다르다. 개인주의적이고 탐미적이며 비정치적인 - 보다 정확히는 정치혐오에 가까운 - ‘비겁자들’이었다. 이전 세대의 도전정신과 패기에 미치지 못하는, 나약하며 사회의식과 책임감이 없는 자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1987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만연했던 권위주의에 희생당하는 자들이기도 하였다.


90년대 세대에 대한 이러한 ‘상상'들은 제법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 근거해있다. 마이카 시대, 해외여행 자유화, 군사정권의 종말, 층층이 쌓여올라가는 63빌딩의 현대성. 이 80년대의 유산으로부터 시작된 풍요와 민주화, 그리고 본격화된 중산층 시대에서 자란 아이들은 일련의 정치경제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이전 세대의 연대감과는 다른, 느슨하지만 독특한 세대의식을 형성했다. 브랜드패션, 배꼽티와 같은 자유분방한 소비주의의 기호들. 그리고 성수대교가 붕괴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순간 엄습한 산업화에 대한 음울한 모더니즘과 '숨가쁘게 사는' 획일적인 삶에 대한 거부감. 하지만 개방적인 성과 향락적 소비문화의 첨병인 ‘너무 나간' 오렌지족들에게는 적절한 반감까지. 미래는 별로 걱정할 거리가 아니었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으며 학교와 직장, 집단이라는 틀에 박힌 곳은 어서 벗어나야 하는 곳이었다. 당신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냐고 묻는 슬램덩크의, 버블 붕괴를 버텨낸 일본의 패배감어린 카르페 디엠의 정서와 동시대에 반향을 일으킨 것도 우연은 아니다.



여러분들의 영광된 시대는 언제였나요?

무한궤도와 공일오비로 대변되는 1980년대 후반을 거친 대중음악의 새로운 정서는 이와 같은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80년대 대학문화에서 파생된 캠퍼스 밴드와도 다르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하려던 다른 한편의 민중문화 대변자들과도 다른, 이 (상위권) 대학 출신 음악가들은 자라나고 있던 세대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세계관을 제공했다. 그리고 80년대를 주름잡던 방송용 댄스음악과 대중적으로 사랑받던 러브 발라드들과는 다른 이 학구적이고 지적인 음악에서 10대와 20대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언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90년대적' 경험은 무한궤도의 대학가요제 데뷔곡인 「그대에게」보다는 앨범의 첫수록곡인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로 함축된다. (“...난 기억해요 내 소년 시절의 파랗던 꿈을 / 세상이 변해갈 때 같이 닮아 가는 내 모습에 / 때론 실망하며 때로는 변명도 해보았지만 /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 대답할 수 있나 /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그대여”) 이 곡은 90년대의 한 축을 지배하게 될 그 독특한 창작집단의 첫 곡이면서도, 만들고 노랫말을 붙인 신해철의 페르소나가 응집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가 설파하던 세계관의 원형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실존주의 풍의 가사가 던져주는 세련됨과 묵직함은 이전에는 접하기 힘든 것이었다.


신해철이라는 사람이 가진 세계관의 원형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같은 물질적 성공을 경멸하고 명예욕을 천박하게 여기는 반출세지향주의,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반집단주의, “세상에 길들여짐”에 의식적으로 저항하는 비순응주의는 그 이후에도 놀랍도록 일관적으로 그의 세계를 지탱해나갔다. 하지만 강조된 것은 어디까지나 적극적인 투쟁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와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살기를, 세상과의 대립보다는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무의미한 암기와 경쟁에 시달리고, 하얀 벽에 둘러싸여 정해진 시간과 규율에 맞춰 움직일 것을 강요받던 아이들에게, 그의 노래와 가사는 그 세대들의 세계관을 형성한 주물이자 또한 그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고 삶의 끝 순간까지 숨가쁘게 사는 그런 삶은 싫어"라는 소절을 단 한번이라도 곱씹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있을까. 이 낭만적 개인주의를 철저히 전면에 내세운 신해철의 두번째 앨범 『Myself』는 그렇게 ‘자기 자신'만이 아닌 한 세대의 송가가 되었다.


낭만적 개인주의를 껴안은 한 세대의 송가


종종 철학적 심오함으로 묘사되던 그의 낭만적 개인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할 생각은 없다. 돈, 성공, 물질적 안위에 대한 경멸감은 이미 경험해본 자들이 부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낭만적 개인주의는 1980년대에 탄생하기 시작한 중산층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었다. 게다가 (억압적인) 세상과 (자유분방한) 나, 어른과 아이, 철듦과 철들지 않음, 길들임과 길들여지지않음이라는 이분법이 X세대의 브랜드 카피로 얼마나 성공적으로 전유되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낭만적 개인주의에 근거한 자기애의 관념이 새롭게 등장한 소비주의의 용어들과 암묵적으로 조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환경론과 산업화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조선일보와 KBS와 같은 메이저 언론사, 그리고 대규모 예능 프로모션과 결합한 1992년의 『내일은 늦으리』가 당시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를 다시금 떠올려본다. 지적 민감함, 예술성, 상업적 성공 가능성 사이에서 치밀하게 조율된 이런 이벤트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모든 비판은 받아들여졌고 허용되었으며, 또 누구에게도 위험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현대생활의 심리적 갈증을 채워주고 한편으로는 댄스가요에 등돌린 성인 취향 소비자들을 포용하면서, 어쩌면 그는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세상’과 공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상과 공존하는, 가장 세련된 음악

2000년대 들어 그는 일종의 정치적 선택을 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어조는 분명히 달라졌다. 논객임을 자처한 그의 입담은 걸죽해지고 표현도 거칠어졌다. 그에게 썩 어울리지만은 않았지만, “개한민국"과 같은 ‘세상’을 향한 독설에 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물론 디워 헌정앨범이나 사교육 학원 광고 등에 대중들도 적잖이 혼란스러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카우치 사건에서 그가 표명한 생각보다 ‘상식적인' 입장에 나 역시 갸우뚱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라디오 방송, 텔레비전 토론 등의 사회적 참여에 비해 2000년 이후 그의 음악활동은 그다지 기억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것은 그의 음악이 이전만큼 매력적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대중의 주목을 끌 만큼 활발하게 활동을 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정치적 선택과 분노


어느 쪽이든 간에 2000년대 이후의 음악적 성과들은 무시되고 90년대의 신해철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이 썩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10대와 20대 초반 이후 한가롭게 음악을 들을 여유를 제공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딱히 ‘저급’한 대중들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적어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신해철과 그의 음악이 그 세대들에게 정신적인 위로와 자기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주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90년대 세대의 비극적 정서의 이면에는 그런 상실감이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386세대가 노무현의 죽음을 자신들 세대의 죽음으로 받아들였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열심히 운동하고 세상을 논하다 자연스레 현실에서도 성공(?)을 거두게 된 그들과 달리, 풍요의 시대를 보냈지만 정작 안착에는 실패하게 된, 예상치 못한 무한경쟁에 내몰렸으면서도 그 고군분투가 썩 눈에 띄지도 않는 이 불안정한 세대에게 그 무게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Struggling...


그리고 그것은 신해철 본인 뿐 아니라 90년대 세대 누구에게도 이른 죽음이다. 게다가 그의 죽음을 90년대의 죽음으로 치부하는 성급한 저널리즘은 더 더욱 이 세대에게 때이른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90년대 세대는 삐삐나 게스 티셔츠 따위를 들이미는 ‘추억팔이'의 소비자로 발견되자마자, 한 상징적인 인물의 죽음으로 인해 역사에서 다시 퇴장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90년대 세대 그 자체가 빠르게 소비되어 버리고, 90년대는 되물어지기도 전에 서둘러 완결지어지고 있다. 상실감은 더욱 더 증폭된다.


좋든 싫든 낭만적 개인주의의 시대는 지나갔다. 2010년대 우리 앞에 놓여진 생은 90년대의 그것보다 훨씬 가혹하다. “전망 좋은 직장"이 없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고, “가족 안에서의 안정"을 위해 출산을 포기하며, “은행구좌의 잔고액수" 때문에 연탄가스를 마시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이전처럼 “행복”이라는 말을 논할 수 있을까. 그가 경멸해 마지 않던 댄스음악이나 들으며 스펙쌓기에 연연하는 어린 세대들을 더 이상 힐난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님은 자명하다. ‘세상'의 논리에 불복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기애는 이제 끊임없이 자신의 매력을 키우고 기계적 스펙만이 아닌, 인문학적 통찰마저 갖추기를 바라는 자기계발 담론으로 포섭되고 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원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이는 또 다른 역설이다.


이런 생각을 해도 괜찮던 시대는 갔다

강일병의 질문을 다시 되뇌어본다. 우리는 정말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 것일까. 어떠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일까. 신해철이 10대의 90년대 세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음악이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앞의 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자각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또 다시 정치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신해철로 상징되는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품에 안으며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삶과 행복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90년대의 종언이 아니라 이제서야 비로소 90년대를 맨얼굴로 마주해야할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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