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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의 별이 떠나갈 때 #14] Keith Emerson : 고전주의와 록, 그리고 한 선구자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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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정보

1960년대 대중음악은 혁명의 연속이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전자악기를 활용한 사운드와 형식이 극적으로 변화하였고, LP의 보급 덕분에 앨범 단위의 제작이 정착되어 음악가의 자의식이 보다 폭넓은 방식으로 투영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다. 게다가 흑인 로큰롤과 재즈를 들으며 성장한 중산층 베이비붐 세대들이 호경기 속에서 음악계에 광범위하게 유입되었고, 매체와 교통의 발달에 힘입은 인적교류는 대륙간 음악적 융합마저 가능하게 만들었다. 단 10년만에 록을 위시한 대중음악은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미국의 언더그라운드와 자립적 문화 공동체들 간에 Psychedelic Music은 하나의 지배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 싸이키델릭 뮤직은 영국으로 흘러가 The Beatles의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1967)의 성공으로 보다 대중적인 인기를 획득하게 하였다. 싸이키델릭 뮤직, 어떤 이에게는 약물경험을 재현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재즈와 가스펠을 전기적으로 확장 가능토록 만든 형식이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더 강력하고 현란하며 빠른 로큰롤을 담지하는 기술적 발전의 일환이었다. 창조적인 방식의 조명기술, 스테이지 매너, 공동체주의,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절충주의와 멀티미디어를 통해 싸이키델릭 뮤직은 1960년대 중후반의 청년문화의 정수를 담은 종합예술로 성장하였고 이는 단순히 좁은 의미의 드럭뮤직이 아니라 백인 청년들의 로큰롤을 의미하는 광범위한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국의 싸이키델릭 뮤직이 재즈와 블루스를 비롯한 흑인 음악과 컨츄리, 웨스턴을 포함한 서부 프론티어 정신, 그리고 비트 문학의 “힙”을 그 자양분으로 삼았다면, 유럽에서는 그와 조금 다른 전통이 더해졌다. 특히 영국에서는 언더그라운드 씬을 중심으로 오리엔탈리즘과 원시주의적 아방가르드의 경향과 동시에 클래식 전통이 록음악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Keith Emerson의 The Nice가 그러했다.


요크셔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Emerson은 정식으로 클래식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줄곧 익혀왔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이끌렸던 것은 베토벤이나 바흐 만이 아니었다. Emerson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부기우기(Boogie Woogie)와 로큰롤, 그리고 재즈를 들으며 성장하였다. 심지어 The Nice 시절 Emerson이 Hammond Organ을 다루게 된 것은 우연히 “Brother” Jack McDuff의 연주를 듣게 된 것이 계기였다. (물론 Emerson의 오르간 연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광기의 오르간 주자 Don Shinn이었다!)



1967년 발표된 The Nice의 첫앨범 『The Thoughts of Emerlist Davjack』은 비록 클래식과 재즈의 테마를 빌려왔지만 기본적으로는 싸이키델릭 록을 근저에 두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The Attack의 기타리스트이자 이후 Jethro Tull과 Roxy Music에서 (잠깐) 활동하게 되는 David O'List가 Emerson과 프론트맨을 두고 갈등하고 있었고, 결국 O'List는 두번째 앨범 레코딩 중 밴드를 떠나버렸다. 3인만이 남은 The Nice는 새로운 기타리스트를 물색하였지만 결국 남은 멤버로 앨범을 완성시킬 수밖에 없었다. 주도권을 잡게 된 Emerson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기 시작한다. 두번째 앨범 『Ars Longa Vita Brevis』(1968)에서 Emerson은 시벨리우스의 카렐리아 모음곡의 간주을 전자악기로 재해석했고, 동명의 타이틀곡 「Ars Longa Vita Brevis」는 무려 20분에 달하는 여섯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전자 교향곡으로 주조해냈다. 비록 아직은 거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Dave Brubeck의 「Blue Rondo à la Turk」를 록의 비트로 변환하고 Bach의 멜로디를 삽입한 첫 앨범의 「Rondo」 보다 한발 더 나가게 된 것이다. Emerson은 이후 두 해간 The Nice를 통해 이러한 정식들을 차곡차곡 수립해가기 시작한다.


한편, 싸이키델릭 뮤직이라는 거대한 모체는 점차 정치적인 문제로 힘을 잃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말감 덩어리 속에서도 이러저러한 전형들, 즉 펑크, 하드록, (이후의) 헤비메탈, 그리고 프로그레시브 뮤직과 같은 형식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싸이키델릭 뮤직과 하드록이 재즈와 블루스에서 영향받아 단순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변주와 즉흥으로 무한대로 확장이 가능한 형태로 발전한 반면, 프로그레시브 뮤직은 클래식 작곡의 기법을 빌려와 광범위한 스케일의 치밀하게 짜여진 악곡, 다시 말해 전자음악의 클래식적 구조라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Emerson이 Greg Lake, Carl Palmer와 함께 1970년에 조직한 Emerson, Lake and Palmer (이후 ELP)가 그러한 경향을 대표하고 있었다.



The Nice는 1970년대가 다가오는 동안에도 나쁘지 않은 커리어를 지속해갔다. 하지만, 밴드의 구성이 못내 석연치 않았던 Emerson은 Fillmore West공연에서 King Crimson의 멤버인 Greg Lake와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밴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곧 둘은 Atomic Rooster에서 활동하던 드러머 Carl Palmer를 영입하여 각각의 두문자를 따 ELP를 결성했다. ELP는 1970년 여름 Isle of Wight 페스티벌에서 공식적으로 데뷔하지만 공연장에 몰려든 어마어마한 수의 관객들을 보면 이미 슈퍼밴드로서의 입지가 다져진 셈이다.


ELP는 The Nice와 같이 키보드, 베이스, 드럼의 간소한 트리오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록 사운드의 핵심을 차지하는 전자기타의 부재는 Emerson으로 하여금 보다 확장된 형태의 연주를 요구하게 되었다. The Nice 시절에는 하몬드 오르간의 가능성을 폭넓게 시험하고 있었지만, ELP에서 그는 (결국 구입하고야 만) 무그 신시사이저(Moog Synthesizer)를 통해 이전의 성과들을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증폭시켜 버렸다. 유사한 클래식 전통에 기댄 Yes가 어디까지나 클래식 악곡들의 몇몇 테마를 변주하거나 구조를 차용하는 등 어느 정도 제한적이고, 그것보다는 타이트한 사운드 메이킹에 신경을 쓴 반면, ELP는 클래식을 보다 급진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1970년도 첫 공연에서 록의 사운드와 비트로 재해석한 무소르그스키(Mussorgsky)의 「Pictures at an Exhibition」을 3인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사운드로 만들어낸다. Black Sabbath만큼 어둡고 축축한 대기 안에 공존하는 서정성은 말할 나위도 없으며, 30분이 넘는 연주시간 동안 클래식과 재즈를 넘나믈며 긴장감을 잃지 않는 탄탄한 구성력 또한 모범적이다. 이를 수록한 앨범을 레코드사가 끝내 거부하다가 앨범 두 장을 내고서야 발매를 허용한 것을 보아도 당시에 이러한 시도가 익숙했던 것은 분명히 아님을 알 수 있다.



클래식 악곡을 록의 에너지로 치환하고 록의 포맷 속으로 흡수하려던 ELP는 다른 프로그레시브 밴드들과는 다른 접근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단지 클래식을 전자악기로 편곡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의 핵심을 꿰뚫고 있던 것은 로큰롤이었다. 레오시 야나체크(Leoš Janáček)의 유명한 관현악곡 「Sinfonietta」의 모티브를 날 것 그대로, 도발적으로 살려낸 「Knife-Edge」(1970)나, Alberto Ginastera의 피아노 협주곡에 기초한 「Toccata」(1973)의 숨막히는 관능성, 그리고 복합적인 구조 안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꿈틀대는 음반 『Tarkus』(1971)는 클래식의 형식과 틀로 정제된 전자 로큰롤 그 자체였다. 게다가 오르간을 흔들어 제끼고 칼을 꼽고 또 그것을 집어 던지는 등 과격한 스테이지 액션은 그의 음악만큼이나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ELP는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에너지를 잃어갔다. 1970년대는 바로 그 이전의 10년만큼이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시대는 더 이상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의 탐미주의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ELP는 해산과 재결성을 반복하며 1980년대까지 몇몇 앨범을 발표하였고 Emerson 역시 솔로 커리어를 이어갔지만 어느 것 하나 전성기 시절의 ELP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비록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지만 유럽의 클래식 전통과 흑인음악, 그리고 록을 자양분 삼아 고전주의와 새로운 청년문화의 미학을 테크놀로지로 승화한 Keith Emerson은 또한 록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키보드 연주자였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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