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Review

현실에서 이격된 피안에의 동경 : 김정미 『Now』

김정미 『Now』
997 /
음악 정보
발표시기 1973.11
Volume 4
장르
유통사 성음
(편집자 註. 본 글은 동두천생활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한 사람을 위한 인문학》에 게재된 글입니다. 원문은 동두천생활문화센터 블로그 [https://blog.naver.com/ddcliving]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동두천 록페스티벌》과 신중현

올 해 정상적으로 추진한다면 《동두천 록페스티벌》은 22회째를 맞게 된다. 횟수로는 최고의 페스티벌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여러 고충이 있다. 그 중 가장 심각해 보이는 건 “록보다는 힙합이지”, “K-pop 대세를 따라야 하는 것 아니야”, “아예 트로트 축제를 하지” 등의 의견들이다. 록음악이 쇠퇴하면서 많은 록페스티벌이 당면한 질문들이다. 이런 비판에 똑 떨어지는 대답이나 뾰족한 의지를 표명할 게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록페스티벌이 다양한 장르를 융합해내는 상황이지만 《동두천 록페스티벌》은 록음악을 고수해왔다. 그 이유에는 한국 록의 대부라고 불리는 신중현이 있다. 한국 최초 록밴드 신중현의 애드포(add4)가 동두천에서 1964년 결성되었다는 역사. 동두천시는 2015년 한국 록의 발생지로서 K-Rock 빌리지를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신중현에게 동두천 이주를 제안하기도 했다.


신중현과 동두천

사실 애드포가 동두천에서 결성되었다는 사실은 좀 더 검증이 필요하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동두천이 한국 록의 고향이라는 말은 단정해서 말하기 주저된다. 파주 장파리나 송탄, 칠곡, 부평같은 곳이 한국 록의 고향이라고 주장해도 비슷하게 수긍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중현이 개인적으로 연고가 있는 기지촌은 송탄이다.) 동두천이 대표적인 기지촌이어서 그렇다면 미8군이 있던 용산은 어떤가?

새삼 ‘한국 록의 고향’, 이라는 타이틀이 그렇게 중요할까 싶다. 지금처럼 록음악이 비인기 스포츠처럼 되어버린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록페스티벌을 만들게 했던 신중현이나 애드포, 록음악에 대해서 동두천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유행에 따라 장르가 흔들릴 수 있다면 축제는 도데체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 록음악이 사라진다고 해도 강건하게 지켜야할 어떤 가치를 이 도시는 가지고 있는가. 동두천은 록페스티벌을 22년동안 그저 관성적으로 해 온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필요하다.


신중현과 밴드들

신중현은 수많은 히트곡을 가진 성공한 작곡가 겸 프로듀서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사회에서 수없이 외면당해왔던 뮤지션이다. 오죽하면 1968년 즈음 한국에서 음악하기를 때려치우고 베트남으로 가 미국 시장을 노리려고 했을까. 돌이켜보면 신중현의 히트곡들은 펄시스터즈나 김추자, 장현같은 가수들에 의한 것이었다. 신중현이 야심차게 만들었던 밴드들, 애드포, 덩키즈, 퀘스쳔스, 더 멘, 뮤직파워, 세나그네 같은 팀들은 참혹하리만치 히트하지 못했다. 「미인」(1974)을 보유한 엽전들만은 예외였지만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엽전들 또한 완벽하게 날개가 꺾여버렸다.

한국 사회에서 록음악은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다. 1970년대 후반 캠퍼스 록으로 잠깐, 1990년대 후반 홍대씬이 생기면서 잠깐, 2000년대 초반 모던록이 이어받은 잠깐. 아주 잠깐씩의 생기를 제외하면 록음악은 늘 어둠의 자식들이었다. 천하의 신중현도 그랬는데 다른 누가 그걸 뒤집을까.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동두천 록페스티벌》이 지녀야 할 가치는 바로 록음악의 ‘인기 없음’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받았던 역사. 그 가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김정미의 『NOW』 (1973) 는 ‘인기 없음의 가치’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싸이키델릭 신중현

신중현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싸이키델릭에 푹 빠져 있었다. 싸이키델릭이란 환각에 의한 현실의 이면을 인간 의식의 확장으로 이해하고 그 경험과 비전을 음악적으로 풀어낸 스타일을 말한다. 1960년대 거세게 일어났던 서구사회 문화적 혁명의 시작이자 영향이었다. 싸이키델릭 신중현은 1970년 시민회관 공연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In-a-Kadda-da-Vida」가 연주되는 17분은 동시대적 무아지경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자욱한 잔디향 사이로 밴드는 취한 듯 굉음을 연주하고 현란한 싸이키 조명(신중현이 직접 제작한)이 뒷벽을 때리면 관객들은 밴드와 함께 신세계를 부유하는 거다.
 

당시 신중현은 수많은 히트곡을 양산하는 프로듀서였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미 트렌드를 근사하게 재현해내는 괴물같은 연주자였다. 물론 싸이키 조명이 난무하는 열광의 무대는 한국 대중들에게 외면당했다. 아니, 받아들여질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것이 옳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힙한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기성세대의 공고한 교조주의가 이 흐름을 철저히 파괴했다.

앨범 『NOW』는 바로 이 때 등장한다. 1973년, 그러니까 싸이키델릭 신중현의 창조성이 폭발하고 있었지만, 한국 사회는 세계적 유행을 퇴폐, 저속으로 규정하여 철퇴를 가하는 시점. 김추자를 프로듀스한 신중현 사단의 대표 가수 김정미였음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내준다는 음반사가 없었다. 어찌어찌 발매는 했지만 방송국은 아예 담합이라도 한 듯 이 앨범을 무시했다. 1972년 박정희 종신 통치가 결정된 유신 제4공화국 초입이었다. 신중현이라고 엄혹한 시대환경을 몰랐을리 없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적 자부심이었다. 당시 신중현은 영미 싸이키델릭을 재현하는 수준에서 한 발 나아가 자기만의 싸이키델리아, 한국적 록음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김정미 『Now』

 
하얀 물결 위에 빨갛게 비추는
햇님의 나라로 우리 가고 있네
눈물로 솟는 해 웃으며 솟는 해
높은 산 위에서 나를 손짓하네
따뜻한 햇님 곁에서 우리는 살고 있구나

- 「햇님」 - 김정미 『Now』 (1973)

앨범을 플레이하면 어쿠스틱 기타가 울려 퍼진다. 싸이키델릭 신중현이 증폭된 사운드로 폭발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반복되는 기타와 서서히 고조되는 오케스트레이션, 그 위에 얹혀진 가사는 모호해서 잘 해석되지 않는다. 김정미의 목소리도 간유리 너머로 들린다. 버스와 코러스 구분도 희미하게 끝까지 간질거리며 어떤 기분이 이어진다.(「햇님」) 김정미의 보컬은 끝 음을 길게 빼기도, 비음을 섞기도 해 낯선 기분이 든다. 왼쪽에서는 넓은 파동같은 바이브레이션이, 오른쪽에서는 즉흥적인 기타 연주가 재잘대면서 다분히 혼란스러운 기분이 든다.(「바람」) 세 번째 트랙 「봄」에서 시종일관 보컬과 보조를 맞추는 베이스 라인을 듣고서야 이 낮선 기분의 정체를 알게 된다.

모호하고 불투명한 느낌, 현실감각을 놓치는 대신 1m쯤 붕 떠서 부유하는 느낌. 그 위로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고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기분 좋은 바람을 맞아들이는 느낌. 김정미와 신중현의 밴드 더 멘이 발견한 싸이키델리아는 약물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보편적인 평화에 가까운 듯 하다. 자연에 대한 동경을 담은 가사는 대지의 근원을 추종하는 신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에서 이격된 피안에의 동경. 이 앨범은 음악에 머물지 않고 꿈을 꾸게 만든다.


21세기의 『Now』

늘 궁금하다. 대마초 파동이 아니었다면 김정미의 앨범은 당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졌을까? 그렇다면 이후의 한국대중음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질문은 당시 한국사회의 교조주의를 통탄하며 신중현을 신화화한 측면도 없지 않다. 김정미의 『Now』는 희소성 덕분에 초반 LP가 450만원에 거래되기도 했을 정도다. 그것도 풍문으로 전해질 뿐 실물을 본 사람도 드물다는 전설적 희귀반이 되었다.

강제적 단절도 과장된 신화도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지한다면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두천록페스티벌이 신중현의 역사에서 지분을 가져왔다면 '록음악의 대부'라는 뻔한 수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탄압의 피해자로 신화화하는 몰개성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회적 탄압에서도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내는 결기, 시대에게 외면받고 끝없이 실패했지만 끝까지 자기 음악을 놓지 않았던 뮤지션쉽. 그런 음악인들을 발견해 내는 것. 그들을 무대에 세우고 박수를 보내는 것. 인기 없음의 가치를 끝끝내 찾아내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김정미는 40년이 훌쩍 지나서 진정한 팬덤을 가지게 됐다. 재발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앨범의 정체를 확인했고 이 치열하게 부유하는 음악은 소수일지언정 음악을 좋아하는 젊음을 사로잡았다. 클럽에서 소규모로 시작한 김정미 트리뷰트 공연은 마치 대마초 파동이 없었다면 바로 이어졌을 것처럼 보이는 풍경들을 만들어냈다. 적어도 그 안에는 앨범 『Now』에 담겨 있던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평화가 넘쳐 흘렀다.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동두천 록페스티벌》이 이런 풍경을 만들어낼 의지와 능력이 있다면 더 이상 록음악의 장르에 갇히지 않고 시민들에게 가치를 전달하고 공유하는 진짜 축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Playlist >
김정미 『NOW』 side A
신중현과 퀘션스 「In-A-Kadda-Da-Vida」 (1970)
김정미 「이건 너무 하잖아요」 (1975) : 퇴폐와 저속의 무브
김정미 데뷔 45주년 기념 헌정공연 《After Movie》 (2016)

Track List

  • No
    곡명
    작사
    작곡
    편곡
  • 1
    -
    -
    -
  • 2
    햇님
    -
    -
    -
  • 3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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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불어라 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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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당신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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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비가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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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나도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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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아름다운 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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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9
    고독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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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가나다라마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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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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