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review타이틀이미지

[Album-Out #6-1] 또 하나의 한국힙합 클래식

이센스 (E-Sens) 『The Anecdote』
by. 선걸 | 2015.10.13
선걸 | 2015.10.13

발매 후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센스의 옥중 신보 『The Anecdote』는 힙합 씬의 뜨거운 감자다. 드렁큰타이거, 에픽하이, 다이나믹듀오 등 굳이 힙합 팬이 아니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여러 선배 메이저 힙합 뮤지션들의 근작보다도 높은 판매고를 올렸음은 물론이고, 뮤지션 본인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높은 완성도를 통해 한국의 2pac, 한국판 『Illmatic』(1994)이란 소리까지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으니 말이다.


정확히 20년 전 2pac의 『Me Against The World』(1995)가 수감 중인 아티스트의 앨범으로는 최초로 빌보드 차트 1위로 데뷔했던 일화를 알고 있다면, 이를 이센스의 현재상황과 연결시켜 보는 것은 나름 흥미로운 대비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Illmatic』과의 비교는 어떨까? 단순히 인물 간의 유사한 상황이나 맥락 등으로 얻을 수 있는 칭호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은 어쨌든 음반 자체, 혹은 그 안에 담긴 음악 자체로 인해 비견되었을 부분이 아닌가.


미국과 한국을 막론하고 힙합 씬에서 Nas의 데뷔앨범 『Illmatic』이 가진 상징성은 독보적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네임밸류에 비해 그 성공의 규모는 의외로 소박하다. 발매 당시엔 골드 레코드를 겨우 넘겼고, 플래티넘을 획득하는 데에는 무려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Dr.Dre의 『The Chronic』(1992), Notorious B.I.G의 『Ready To Die』(1994), 2Pac의 『All Eyez On Me』(1996), Eminem의 『The Marshall Mathers LP』(2000) 등이 이룬 성공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Illmatic』은 조금 전 예시로 든 음반들처럼 세상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 10대 청소년들이 열광하며 즐길만한 뜨거움이나, 블랙뮤직 팬부터 일반 팝 팬까지 모두를 휘어잡을 수 있는 대중성을 갖춘 음반이 아니란 뜻이다. 다만 『Illmatic』은 그 자체로 음악 역사에서 하나의 기준점과 같은 앨범인 것은 분명하다. 트렌디한 사운드나 대중성, 그리고 이슈화 등에 대한 고려 없이 정통성을 가진 양질의 비트와 랩이 빈틈없이 융화되는 것만으로 어떤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지침이랄까. 하지만 씬 안에서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을 가진 신인도, 이런저런 노력으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베테랑도 이런 실험을 위해 앨범 한 장을 통째로 할애하기란 쉽지 않다. 그만한 퀄리티가 나올 자신도 없고, 나온다 해도 잘 팔릴 것 같지 않아서다. 그래서 흔치 않은 케이스고, 세월이 흘러도 빛이 날 수밖에 없다.


어느덧 20년 가까이로 접어든 한국 힙합 씬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한국판 『Illmatic』에 비견되는 영예를 안은 앨범은 (내 기억으론) 딱 두 장 뿐이다. 하나는 빅딜의 멤버 데드피가 발표한 데뷔앨범 『Undisputed』(2004)였고, 다른 하나가 이센스의 본작 『The Anecdote』다. 게다가 『Illmatic』과 방금 언급한 두 앨범의 발매 주기는 기막히게도 각 10년씩이다. 한 나라의 힙합 씬을 통틀어도 『Illmatic』같은 앨범이 나올 확률은 10년에 한 번 될까 말까 하다는 증거이리라.


이센스의 『The Anecdote』는 10년 전의 『Undisputed』보다도 많은 부분에서 『Illmatic』과 맞닿은 점이 많은 앨범이다. 한 장의 앨범으로서 『Illmatic』이 가진 표면적 특징을 무 자르듯 간단히 나눠 수사화 해보면 ① 단촐한 구성(‘명반은 10곡이다’), ② 붐뱁의 기본에 입각한 묵직한 비트, ③ 지역성/일상성을 서정적으로 엮은 가사와 스킬풀한 랩핑, ④ 대중적인 멜로디나 스타일 등과의 거리감, ⑤ 이 모든 것들의 타이트한 조화와 일관성 정도를 꼽을 수 있을텐데, 『The Anecdote』는 드물게도 이 모든 항목을 일정 이상 만족시키는데 성공한 앨범이다.


알다시피 ‘Anecdote’의 사전적 의미는 ‘일화’ 또는 ‘개인적인 진술’ 등이다. 그런 제목에 걸맞게 앨범 내에서 이센스의 가사는 상당히 일상적/개인적이며, 서술방식은 가능한 힘을 뺀 채 자신을 둘러싼 일상과 생각에 대해 담담하고 진솔하게 풀어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서술자의 시선이 그리 아름답거나 이상적이지만은 않다. 이센스는 앨범의 첫 곡 「주사위」에서 그러한 시각의 형성 배경으로 학창시절 처음 바라봤던 세상의 삐딱한 풍경들을 제시하고 있다. 「A-G-E」, 「삐끗」, 「Tick Tock」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세상 속 다양한 대상들과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불만 어린 시선이 견지된다. 하지만 그런 불만표출의 수위는 스윙스 같은 동료 래퍼들의 그것처럼 과하지 않다. 이따금 육두문자가 등장하긴 하지만, 명확한 비난이 아닌 생활언어의 일부로 느껴지는 정도다. 심지어 수 년 전의 떠들썩했던 디스전에 대한 후일담성 트랙인 「10.18.14」마저도 그저 대상의 컴백 풍경에 대한 자신의 ‘느낀 점’을 서술하는 선에서 만족하는 모습이다.


앨범의 다른 축으로써, 지나보내 온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삶의 과거들을 회상하는 내용의 「Next Level」, 「The Anecdote」, 「Back In Time」 등에서도 이센스의 언어와 감정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를테면 일찍 떠난 아버지와 가족에 대한 서글픈 애정이 담긴 「The Anecdote」는 가장 감정적으로 소구할 여지가 많은 곡이지만, 유사한 내용을 담은 래퍼 마이노스의 솔로 1집에 수록된 「God Loves Ugly」(2008)나 결정의 앨범에서 참여한 싱글 「Memory Time」(2006)같은 곡들만큼 절절하게 다가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자퇴생이 래퍼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Next Level」 역시 만약 이것이 도끼의 곡이었다면 랩 대회 1등에서 첫 무대까지의 무용담으로 1절을 채운 뒤, 2절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실력과 부를 자랑하는데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센스는 이 모든 이야기들의 서술에 있어 사실에 입각해 담담하게 당시 자신의 심경만을 전달한다. 「Writer’s Block」의 “근데 난 요즘 한국 래퍼 듣고 좋은 적이 없네. 그냥 내가 해야지”라는 선언조차 힙합 특유의 스웩(Swag)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가사의 과하지 않은 적당함이 앨범의 미덕으로 느껴질 수 있는 주된 요인은 물론 랩의 타이트함에 있다. 기술적으로 화려하게 보이도록 라임을 배치하거나 플로우를 짜놓은 것도 아니고, 공전의 히트곡 「꽐라」(2007)처럼 독특한 랩스타일의 경이를 선보이지도 않지만, 앨범 안에서 이센스가 거친 곡과 부드러운 곡을 오가며 내뱉는 랩 한마디 한마디는 내추럴한 톤과 출렁이는 바이브로 앨범 전반을 메우며 근래 어느 래퍼의 랩보다 온전한 형태의 ‘랩 스킬’로서 전달되는데 성공한다.


이센스의 랩이 이 같은 견고함으로 다가올 수 있는 데엔 역시 전곡의 프로듀서를 맡은 Obi Klein의 비트가 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가 제공한 정박의 묵직하면서도 포근한 질감의 느낌의 비트들은 문득문득 『Illmatic』이 나왔던 90년대 초중반 바로 그 시절 DJ Premier와 Pete Rock, Q-Tip 등의 비트가 2015년에 맞춰 좀 더 소프트하고 모던한 감각으로 재구성 또는 오마주된 것은 아닐까 싶을만큼 붐뱁과 샘플링에 입각한 비트메이킹의 원류를 충실히 따른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통성을 획득한 비트를 하나의 온전한 힙합 트랙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물론 이센스의 랩이다. 본 문단 안에서 랩과 비트에 대한 설명이 서로 이루고 있는 순환처럼 앨범은 두 사람의 비트와 랩,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들어내는 상호작용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질량을 자랑한다. 대중적인 멜로디가, 중독적인 훅이나 코러스가, 화려한 피처링진 (『Illmatic』의 유일한 게스트인 「Life’s A Bitch」의 AZ처럼 『The Anecdote』에도 외부 게스트는 단 한 명 뿐이다) 등이 헤집고 들어갈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The Anecdote』는 분명 랩도, 비트도, 그것들이 이루는 조화까지도 부족함 없이 잘 짜여져 있는 멋진 앨범이다. 일상적이면서도 디테일한 서술법과 서정성에서 나오는 감흥 또한 충분하다. 또 하나의 한국힙합 클래식의 탄생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말이다. 이 앨범이 ‘한국의 『Illmatic』’으로 등극하는 일은 사뭇 꺼려진다. 『Illmatic』과 유사한 매력을 뽐내지만, 그만큼 특별한 앨범이라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어폐가 있다. 『Illmatic』이 남긴 것이 앞서 제시한 것과 같은 앨범의 퀄리티와 특유의 덕목만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앨범 자체에서 벗어나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앨범은 한 사람의 래퍼가 살아온 지역과 그 동지들이 내뿜는 거친 정서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퀸스브릿지 힙합’이라는 새로운 조류를 열어젖혔다는 역사적 의미 또한 갖고 있다. 하지만 이센스와 『The Anecdote』가 지향하는 지점은 그보다는 좀 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한국 힙합 씬에 ‘빅딜 스타일’의 새로운 무브먼트를 알린 『Undisputed』쪽이 보다 『Illmatic』의 의미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The Anecdote』에 쏟아지는 지금과 같은 수준의 대중적 관심과 반향은 일종의 ‘반작용’으로 인한 부분이 크지 않을까 한다. 사실 『The Anecdote』는 이센스의 구속 이전인 작년께 이미 완성되어 있던 앨범이고, 그 때 바로 발매되었다면 아무래도 지금만큼의 반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과 차, 여자에 대한 라이프 스웨거, 의미 없는 워드플레이와 라임놀이, 대중적 코드구성과 화려한 퍼포먼스를 덧씌운 ‘쇼미더머니’식의 연출 정도가 힙합음악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대중의 인식에 박혀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 앨범이 지닌 과하지 않은 타이트함과 출중한 완성도는 모종의 ‘대안문화’와 같은 형태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최근 이와 유사한 지향점을 나타냈던 딥플로우의 『양화』(2015), 라임어택의 『NBA』(2015) 같은 앨범들도 있었다. 하지만, 잘 모르는 이들이라면 이 앨범들로부터 근래의 다른 힙합음악들과 표면적인 작법 및 분위기 등에서 이센스의 앨범만큼 명확히 다른 지점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라임어택과 딥플로우는 이센스만큼 '대중적 유명세'를 치른 래퍼가 아니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센스의 앨범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다. 그는 그저 하고 싶은 음악,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했고, 결과물은 재론의 여지없이 출중하다. 나는 단지 이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앨범을 대안문화로까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좋은 앨범을 '그냥 좋은 앨범'으로만 놔둘 수 없는 힙합 씬의 현실이 불쾌하다. 한국힙합의 역사 20년차에 나온 이센스의 신보에 한국의 J.Cole, 한국의 Kendrick Lamar 정도가 아닌 한국의 『Illmatic』이란 십자가를 지워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한국힙합의 토양이 그간의 세월 속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왔다면, 지금 이만큼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Illmatic』과 같은 본류에 대한 기준점과 같은 앨범이 등장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결국 이것은 한국 힙합 씬이 잘못된 방향으로 성장해 왔다는 뼈아픈 반증이며, 이센스와 『The Anecdote』에 대한 어긋난 책임론이다.


  • Credit
  • All tracks produced and arranged by OBI for DEEKAY Music
    All lyrics by 강민호, except for "Tick Tock" by 강민호 and 김동현
    All programming and instruments by OBI except guitars on "Writer's Block" performed by Johannes "Josh" Joergensen
    Various acoustic instruments perfored by Pernille Sejlund on "The Anecdote"
    "A-G-E" and "The Anecdoed" contain samples from the album "Time For Reflection" by Pernille Sejlund, all rights reserved
    All songs recorded and engineered by OBI at DEEKAY Studios, Copenhagen
    All songs mixed and mastered by Martin Larsson at DEEKAY Studios.

    Executive Producer : Keyon Kim
    Album Producer : Keyon Kim, 강민호
    A&R Direction & Coordination : Keyon Kim
    International A&R & Promotion : 조한나
    Publicity : 임대범
    Art Direction & Design : 김현지
    Cover Photography : Teh Kang
Track List
  • 01. 주사위 L이센스 COBI AOBI
  • 02. A-G-E L이센스 COBI AOBI
  • 03. Writer's Block L이센스 COBI AOBI
  • 04. Next Level L이센스 COBI AOBI
  • 05. 삐끗 L이센스 COBI AOBI
  • 06. 10.18.14 L이센스 COBI AOBI
  • 07. The Anecdote L이센스 COBI, Pernille Sejlund AOBI
  • 08. Back In Time L이센스 COBI AOBI
  • 09. Tick Tock (feat. Kim Ximya) L이센스, 김동현 COBI AOBI
  • 10. Unknown Verses L이센스 COBI AOBI
태그 | 앨범아웃,이센스 댓글 (0)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해 주세요
person_pic
submit 버튼
snsICON snsI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