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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魔王 #22] Crom´s Road : 자취를 찾는 여정 Part.2 (200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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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정보

신해철이 홀연히 떠난 후, 그의 자취를 되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호기로운 도전이 절규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더군요. 그가 남긴 발자국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었습니다. 찾을 수 있는 건 다 찾고, 들을 수 있는 건 모두 다시 들어봤지만, 아예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트랙들도 적잖이 있어서 아쉬움이 남네요. 그래도 여기서 다룬 싱글이나 앨범들은 대부분의 음원사이트들에서 들어보실 수 있는 곡들입니다. 이 글이 독자여러분들께 마왕의 발자취를 쉽게 추억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면 합니다.

36. 신해철 『OST:영화《세기말》』 (2000.01)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의 멤버로 합류하는 임형빈이 함께 하고 있지만, 록밴드 포맷 보다는 전자음악, 『Monocrom』 보다는 『Crom's Techno Works』에 가까운 작품이다. 온전한 곡으로 구성된 트랙을 최소화하고, 짤막하지만 집중력있게 주인공들의 테마를 구성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후 《쏜다》 OST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영화가 보여주는 음울한 분위기의 구현에는 이 방식이 가장 어울렸을 것 같기도 하다. 「The Magic Glass Part.2 : A Private Disaster」에서 이러한 작품의 분위기가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그의 지속적 관심사였던 전자음악과 국악의 결합을 「The Seeds Part.4 : Outro」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해철이 작업한 영화음악 중 가장 알려지지 않았으나, 가장 음반으로서의 통일감을 가지면서도 영화와 싱크로율이 높은 작품. (그러나 영화는 흥행에 대실패했다. 역시 마이너스의 손.)

37. V.A 『Game Music Vol.1:Starcraft』 (2000.02)
- 「Zerg Are Coming : Zerg Theme」 (글/곡/노래)

『Homemade Cookie』를 발표하고 얼마 있지 않아 발표한 곡이다. 《Starcraft》 게임 중계에서 "해처리가 터집니다"라는 멘트에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는 후일담도 있지만, 어쨌거나 신해철 그 자체는 서브컬쳐에 대한 취향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자유주의자였다. 『99 Crom Live』부터 함께한 임형빈이 그의 팀으로 합류한 것이 인상적이지만, 작품 자체는 과거에 발표했던 음산한 스타일의 전자음악 (「1999」 등) 과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

38. 문차일드 『Delete』 (2000.04)
- 프로듀싱, 「Delete」, 「A Boy From The Moon」, 「Someday」, 「She」 (글/곡). 
  「You're Falling in Love」 (곡)

신해철 자신이 "문차일드의 프로듀싱을 맡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을 함께 했던 임형빈까지 함께 크레딧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 저간 사정을 볼 때 앨범의 전반부까지는 신해철이 프로듀싱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후반부의 트랙 3개는 명확히 다른 컨셉을 지향하는 게 뚜렷한데다, 실제 히트한 곡은 윤일상의 곡 「Summer Time」이기까지 했다. 당시 기획사 대표가 김광수(GM기획)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예상가능한 구성이긴 하다. 지금에서 들어보면 「Delete」에서 구사하는 이수의 하이톤 보컬은 이후 다른 발라드 히트곡들에 비해 합이 맞지 않는 인상을 주긴 한다. 어쨌든, 신해철이 관여한 부분의 상업적 실패는 '테크노록'이라는 팀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상황으로 발전했고, 때마침 발생한 기획사 부도 등의 사정에 의해 엠씨더맥스로 재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신해철은 후배 가수로 이수를 매우 아낀 듯 한데, 이는 트위터에서 '이수의 오토바이'에 대한 언급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39. V.A 『Indie Power 2001』 (2001.01) / 40. 크래쉬 『The Massive Crush』
-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글/곡)

안흥찬은 전화 한 통화로 이 곡의 리메이크 허락을 얻은 후, 전자음악에 가까운 원곡을 (전자음이 일부 배합되어 있긴 하지만) 정통 스래쉬 메탈로 편곡했다. 당시 최고의 히트를 기록한 TTL 광고에 삽입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크래쉬를 가장 대중적으로 알린 곡이 되었다. 원곡 자체가 록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기타와 드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루핑이 깔리고 있기 때문에 크래쉬의 메탈 버전이 주는 어색함이 거의 없다. 정규 5집 앨범 『The Massive Crush』에 보다 타이트하게 편곡된 버전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비교해서 들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41. V.A 『A Tribute To 들국화』 (2001.02)
- 「사랑한 후에」 (프로듀싱/노래)

트리뷰트 앨범의 열풍은 들국화도 피해가지 않았다. 이미 근작 비트겐슈타인으로 대중의 외면을 당했던 신해철은, 이 음반에서 전인권의 풀 파워가 실린 「사랑한 후에」를 선택하는 바람에 당시 평단에 소위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경험을 했다. 이 음반을 프로듀싱한 강헌은 팟캐스트 《진중권의 문화마당》에 출연하여 "「사랑한 후에」는 기획 당시 모든 아티스트가 선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에서 갓 귀국한 신해철을 찾아가 부탁했는데, 못 부르는 자신이 불러야만 이 곡의 가치가 조명된다며 그 짧은 시간 내에 작업해내는 것을 보면서 보존해야 하는 가치에 임하는 자세를 알 수 있었다"는 소회를 피력했다. 누가 봐도 손해가 예상되는 상황일지언정 자신이 옳다 싶으면 회피하지 않는 그의 성격이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작품이다.

42. 핑클 『Memories & Melodies』 (2001.04)
- 「눈동자」 (글/곡)

엄정화가 혼자 가창한 「눈동자」를 핑클 4명(사실상 2명?)이 돌아가며 불렀다. 조성모의 리메이크 앨범 『Classic』의 대히트는 당연히 리메이크 앨범 기획의 러쉬로 이어진다. 하지만 성급한 기획으로 만들어진 핑클의 리메이크 앨범 『Memories & Melodies』는 좀 민망한 수준의 작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앨범에서는 「당신은 모르실거야」가 일정 이상의 히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곡보다는 핑클의 네임밸류에 기댄 것으로 평가 가능하다.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한다'로 요약가능한 기획사의 주먹구구식 운영은 때로는 이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는 좋은 예시다.

43. 버튼 『The Being』 (2001.07)
- 프로듀싱, 「말해봐」 (글/곡), 「눈동자」 (글/곡)

'모던록을 하는 여성팀'이라는 명확한 컨셉아래 신해철이 전체 편곡과 프로듀싱을 진행한 앨범이다. 자우림이나 주주클럽의 히트가 이런 스타일의 기획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하긴, 신해철이 「아주 가끔은」(1996) 같은 곡들에서 선보인 하이톤의 여성보컬을 다루는 역량을 감안한다면 잘 어울리는 부분도 있다. 신해철이 작곡한 「말해봐」에서는 줄리엣의 「기다려 늑대」(1997)가 단박에 떠오르기도 하며, 엄정화가 불렀던 「눈동자」는 원곡의 효과음이 일부 살아있으면서도 보다 록킹하게 편곡한 것이 인상적이다. 자신의 인터뷰에서 이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신해철은 의뢰받아서 진행한 작품들을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긴 밴드음악인데 세션들과 함께 한 '2인조 모던록 팀'은 말이 안되는 부분이 있으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44. V.A 『樂 and Rock』 (2001.08)
- 「민물장어의 꿈(글/곡/노래)
- 「Second Turning - 닥터코어911」, 「욕망이라는 이름 - 박완규」 (프로듀싱)

이 앨범처럼 기획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작품도 흔치 않다. 아마, 당대의 네임드 아티스트들이 신작을 한데 모아 내면 판매량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다소 안일한) 의도가 엿보이는데, 그렇다고 치기엔 좀 많은 고퀄의 작품들이 숨어 있기도 하다. 신해철은 이 작품에서 「민물장어의 꿈」을 재녹음해서 수록하고, 닥터코어911의 신작 「Second Turning」 및 박완규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프로듀싱에 참여한다. 그전에 이미 완성형 밴드였던 닥터코어911에서는 신해철의 흔적을 찾기 힘든 반면, 2000년 발표작인 「욕망이라는 이름」은 기존의 메탈성향에 신해철이 그간 보여줬던 하드코어 테크노의 맥락이 녹아 들어 보다 하드하게 변모하였다.

45. V.A 『Indie Power 2002』 (2002.05)
- 「일상으로의 초대 - Ynot?」 (글/곡)

도입부에서 신해철의 낮은 목소리가 울려퍼지다 이내 스카 리듬으로 흥겹게 편곡된 「일상으로의 초대」가 들려온다. 원곡이 마초의 진중한 고백이라면, 와이낫의 버전은 화사한 프로포즈라 하면 비교하기 쉽겠다. 원곡을 크게 비틀지 않고도 확연히 다른 버전의 곡을 만들어낸 리메이크의 모범사례라 할 만 하다. 와이낫은 『Struggling』 콘서트의 오프닝밴드로도 활동했고, 신해철이 진행하는 라디오 《고스트스테이션》의 인디 차트에 자주 거명되며 신해철과 인연을 이어 나갔다. 2010년의 그 유명한 씨엔블루와 송사를 겪고 있을 때, 신해철은 "그들이 밴드면 파리도 새다."라는 덧글을 남겼다가 언론에 또 한 번 고초를 겪기도 한다. '강한 자에게 강한' 신해철을 상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46. V.A 『Red Devil 2002 Official Album:꿈★은 이루어진다』 (2002.06)
- 「Into The Arena : 다구리가」 (곡), 「아리랑」 (곡/노래)

신해철이 그동안 습득한 모든 믹싱관련 기술을 총동원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 영국 유학 당시 홈의 축구팀을 응원하는 광경을 보고 만든 곡으로 그 유명한 "대~한민국"의 원본이다. 축구 응원에서 기본으로 쓰이는 북과 깽과리에 태평소, 드럼, 일렉기타와 떼창 등 이질적인 사운드들이 하나로 모여있음에도 어느 하나 소리가 튀지 않는 수작이다. 신해철 자신도 각종 인터뷰에서 이 곡에 대한 자부심을 직간접적으로 표출할 정도로 애착을 갖는 곡이다. 또다른 수록곡 「아리랑」에서도 태평소와 메탈사운드를 이질적이지 않게 믹싱하는 역량을 선보인다. "음덕" 신해철의 역량을 집약시킨 작품

47. 김수철 『Pop & Rock』 (2002.07)
- 「이대로가 좋을뿐야」 (노래)

단촐한 리듬으로 구성된 드럼 비트위에 살벌하게 기타를 갈기는 김수철의 모습과 연상됨과 동시에, 펑키한 리듬위에서 질러대는 신해철의 흉성은 한상원과 함께 한 「너의 의미」에서처럼 꽤나 잘 어울린다. 원맨밴드를 구성하고 국악에 대한 탐닉해가는 과정을 보면 김수철과 신해철은 난형난제의 여정을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두 장인이 '그냥' 흥겨운 록큰롤에서 재미나게 노래하고 기타치는 모습이 그려지는 푸근한 작품이다.

48. 신해철 『Struggling』 (2002.09)

신해철 최초의 베스트 앨범. 캐리어 내내 수많은 장르를 탐식해온 그답게 베스트앨범도 장르에 따라 록, 팝, 발라드의 3CD 구성으로 리마스터링만 하여 발표했다. 신인으로서 자존을 꺾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을 증명해야 했던 시기, 메탈키드가 가질 수 있는 필생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 음덕이라 해도 좋을만큼 소리를 표현하는 기술에 대한 집착. 이처럼 할 수 있고, 하고 싶었던 거의 모든 음악들을 구현하고자 노력한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CD 3장에 정리하라는 것은 고문에 가깝다. 차선책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곡과 대중의 사랑을 받은 곡들을 선정해서 안배하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49. V.A 『Project X』 (2003.02)
- 「Sex, Crime, Violence」 (글,곡,노래) , 「Killer feat.싸이」 (글,곡,노래)

MP3의 등장과 더불어, 『戀歌』를 필두로 쏟아진 2000년대 초반의 컴필레이션 앨범 홍수는 음반시장을 급격히 위축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각종 기획성 앨범이 등장하게 되는데, 『Project X』 또한 O.M.D (Original Music DVD)라는 괴상한 컨셉과 함께 등장한 작품이다. 주어진 영상을 보고 음악을 만드는 방식이라고는 하나, 스토리가 뜬금없다면 이 음악들의 맥락을 찾기가 매우 힘들어 보이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 밖에 없다. 「Sex, Crime, Violence」는 예의 음산한 신해철표 전자음악과 궤를 같이하고, 싸이와 함께한 「Killer」는 헤비메탈의 성향의 곡이다. 차승원과 김민정이 등장하는 뮤직비디오가 좀 멋있는게 위안이라면 위안인 작품.

50. 차태현 『The [Bu:k]』 (2003.05)
- 「Summer Story」 (글)

무한궤도의 「여름이야기」를 재편곡해서 「Summer Story」라는 곡명으로 발표했다. 매우 평이한 리메이크라 딱히 언급할 부분이 없는 곡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슈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2008년 김재홍이 언론을 통해 "자신과 사전 접촉없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을 공개한 바 있다. 이 곡은 신해철이 가창한 작품 중 드물게 신해철이 작곡하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저작권에 관한 개념이 희박하던 시기라 원곡자였던 김재홍의 승인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작권협회에 김재홍이 저작자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서 발생한 해프닝이긴 하지만, 리메이크할 때 원곡자의 승인을 받는 절차의 중요성을 재조명하는 소소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에 해명들이 없었던 것으로 봐서 물밑으로 해결하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51. 신해철 『OST:게임《Guilty Gear XX #Reload:Korean Version》』 (2003.06)

게임계 로컬라이징의 모범사례로 알려진 대전 격투게임 《길티기어 샤프리로드》의 한국판 OST이다. 신해철이 작업한 사운드트랙들은 '단일 주제에 대한 일관성있는 구성'이라는 원칙을 갖고 있는데, 본작에서는 이의 극대화된 결과가 나타난다. 각 캐릭터 및 개별 엔딩 테마, 심지어는 옵션이나 캐릭터 선택 부분의 음악까지 일관성 있는 정성을 쏟아부은 티가 역력하며, 일본판 OST보다 월등한 음악 및 사운드로 구성되어 있어 콜렉터들을 위해 역수출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시기적으로 『개한민국』과 겹칠 때라, 일부 테마가 재활용되었다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다. (『개한민국』때의 멤버들이 녹음에 함께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Vengence is mine : Kliff's Theme」는 「감염 : Infected」, 「Rogue Hunters : Assassins」는 「Dear America」, 「Final Opus : Survival Mode Ending」은 「Laura」, 「Options」는 「Devin's Boogie」에서 확인 가능하다. 비교해서 들어보면 흥미가 배가될 것이다.

52. 이승기 『나방의 꿈』 (2004.06)
- 「시작」, 「앵콜」 (곡)

「내 여자라니까」라는 메가히트곡이 유명하지만, 이 작품에 신해철이 참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싸이가 프로듀싱을 맡은 본 앨범에서 앨범의 시작과 끝을 맡아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승기는 《MBC 다큐스페셜》을 통해 "어떤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진지하게 묻던 신해철을 회고했다. 「앵콜」은 그간 신해철이 보여준 슬로우록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는 작품으로, 이제 첫 작품을 발표하는 아티스트의 입장을 잘 담아낸 싸이의 가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앨범을 닫는 곡으로서의 역할을 넘는 여운을 준다.

53. V.A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앨범』 (2004.12)
- 「하늘 feat. 싸이」 (곡/노래)

강헌은 『노동의 새벽』 헌정앨범을 기획하면서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신해철에게 프로듀싱을 무조건 맡아달라는 강권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본작을 들어보면, 각 장르에 맞는 밸런스를 부드럽게 유지해주는 신해철의 역량에 감탄하게 된다. 자신의 참여곡 「하늘」은 박노해의 시가 가지고 있는 산문의 성격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각 버스를 랩으로 구성하고, 후렴구는 전형적인 싸이표 발라드로 구성하여 자칫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시어들을 온전히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신해철은 이 음반을 통해 단촐한 연주에 가사만 또렷이 들리도록 편곡하는 도그마에 빠진 민중가요의 '재해석'에 도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노동의 새벽」이나 「대결」등의 작품으로 이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의 꿈이었던 오케스트레이션 버전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접할 기회가 영영 사라졌다는 것 뿐이다.

54. 신화 『Winter Story 2004-05』 (2004.12)
- 「안녕 - 이민우」 (글/곡)

신해철의 솔로 1집 수록곡 「안녕」을 이민우의 목소리로 리메이크 했다. 중견이든 아이돌이든 리메이크 앨범은 피해갈 수 없는 기획으로 자리 잡았고, 신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돌팀의 리메이크는 '기획'이 너무나도 강해서 자신들의 색깔을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원곡의 아우라가 무척 세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전작 『Brand New』 공개 후 4개월만에 발표한 작품에 얼마나 성의가 들어갈 수 있는지 의문을 키우는 작품이라 딱히 짚어낼 포인트도 없다.

55. 싸이 『Remake & Mix 18번』 (2005.07)
- 「도시인」 (글/곡)

넥스트의 데뷔앨범 『Home』에 수록된 곡을 전형적인 싸이의 스타일로 리메이크했다. 싸이의 음악은 랩에 기반한 댄스를 표방하고 있으나, 「새」(2000), 「낙원」(2003) 같은 곡에서 드러나듯이 곡쓰기나 가창의 방식이 록에 가까운 성향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랩을 나레이션처럼 퍼붓는 것조차 신해철과 비슷하다.) 대마초로 2001년부터 활동 중지된 싸이는 2002년 월드컵 때 우연히 활동을 재개했고, 이 때 각종 응원 공연 및 『한미 SOFA 개정운동』에 신해철과 함께 참여하면서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탱크 부수기 퍼포먼스'도 이 때 신해철과 함께 한 것이다.) 리메이크 앨범을 기획할 때 신해철의 곡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신해철과 함께 했던 무대들의 경험이 이후 자신의 공연에 자양분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56. V.A 『2005 국악축전 기념음반』 (2005.10)
- 「Rush To The Battlefield」 (곡)

출정을 독려하는 진군가의 감흥이 물씬 풍기는 일렉트로니카곡이다. 샘플링된 태평소의 루프가 말의 울음을 감싸고 말달리는 소리를 앞세워 독특한 긴장감을 유발한 후, 태평소 → 북→ 징 → 꽹과리의 소리가 점층적으로 추가되는 과정에서 이 소리들를 난잡하게 들리지 않도록 감싸는 키보드 백킹과 어울려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태평소가 이끄는 주선율에 따라 후반부로 갈수록 휘몰아치는 북과 꽹과리의 질주는 이 곡의 백미다. 신해철의 디스코그라피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2005 국악축전 기념음반』에는 신해철 외에도 한영애, 김현철, 달파란 등 명망있는 아티스트 들이 대중음악의 문법으로 국악을 녹여낸 수작들을 수록하고 있다.

57. V.A 『Go For The Final』 (2006.04)
- 「돌격! 아리랑」 (곡),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숨결 feat.바다」 (글/곡/노래)

신해철 자신이 축구를 좋아해서인지 2006년 월드컵에도 응원가 앨범을 발표한다. 「Into The Arena」를 더욱 헤비하게 편곡한 바탕 위로 겹겹이 쌓여 올라가는 아리랑의 떼창은 이전의 응원가들보다 훨씬 묵직한 기를 전달한다. 사물놀이에서 느낄 수 있는 리듬의 격동을 드럼으로 온전히 바꿔낸 것이 인상적이다. '돌격'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록으로 구현한 「아리랑」 중 가장 세련된 버전이겠다. 그 밖에도 폐막식의 엔딩곡을 연상케 하는 바다와의 듀엣 「하나의 숨소리, 하나의 숨결」도 수록되어 있다.

58. 스키조 『Fight Against the World』 (2006.06)
- 프로듀싱

스키조는 데뷔반부터 전자음악과 랩코어를 뒤섞는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신해철은 이들의 공연을 보고 바로 스카우트했다는 후문이 있다. 본작은 신해철이 설립한 기획사인 사이렌에서 나온 거의(?) 첫 작품으로, 신해철이 프로듀싱 및 키보드 연주에 참여하고, 「재즈카페」 가사를 삽입하는 등 (「Baby All Night」) 매우 공들인 표시가 역력하다. 전작에 비해 사운드의 요철이 선명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전반적으로 속도감 있는 리듬의 운용이 인상적이다. 마치 모노크롬의 도플갱어를 보는 것 같아 이채롭다. 이후 활동이 뜸해진 스키조는 2012년 허재훈(보컬)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탈퇴한 상태로, 주성민(기타)은 일렉트로니카팀 비트버거, 복남규(드럼)은 로로스, 이혜림(베이스)는 솔로로 활동 중이다.

59. 피터팬콤플렉스 『I'm a Beautiful Man』 (2006.10) / 60. 피터팬콤플렉스 『Love』 (2008.04)
- 『I'm a Beautiful Man』 : 프로듀싱, 「안녕」 (참여)

피터팬콤플렉스의 리더 전지한은 자신들이 해체 위기에 몰렸을 때, 신해철의 전화 한 통이 밴드를 유지하는데 결정적 자극제가 되었다는 인터뷰를 한 바 있다. 이어 신해철은 피터팬콤플렉스의 3집을 프로듀싱하면서, 밴드가 그전에 가졌던 매너리즘을 극복하는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음악들이 Radiohead의 워너비에 가까웠다면, 본작부터 보다 적극적인 신디사이저 및 건반의 활용으로 스타일을 바꾸는데 성공한다. (「Great」를 들어보면 확실히 바뀐 스타일이 드러난다.) 4집 『Love』에서는 다시 셀프 프로듀싱으로 돌아서서 3집에서 시도한 스타일을 확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근작들에서는 신스팝밴드로 변신한 그들을 만날 수도 있다. 대신 신해철의 곡 「안녕」을 감정을 쥐어짜내는 듯한 처연한 리메이크를 선보인다. 확실히 신해철의 곡은 그냥 편곡자가 붙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색이 확실한 아티스트들이 편곡했을 때 시너지가 나는 듯 하다.

61. V.A 『OST:SBS드라마 《천국보다 낯선》』 (2006.08)
- 「Stranger Than Heaven」 (글/곡/노래)

김민정, 이성재, 엄태웅이 주연한 SBS 미니시리즈 《천국보다 낯선》의 엔딩 타이틀곡이다. 당시 신해철이 발표해왔던 건반 위주 발라드 성향의 음악과는 달리, (당시 유행했던 영국 밴드들이 구사한 음악으로 퉁칠 수 있는) 모던록 계열의 연주를 들려준다. 이는 록밴드 보컬리스트가 주인공인 드라마의 주제곡임을 십분 감안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주몽》과 일전을 벌이느라 드라마 자체는 대실패했지만, '비운의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타이틀은 얻었다. 전지한(피터팬콤플렉스), 윈터그린, 투셀(김세황) 등 수준급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OST 역시 참여 아티스트들의 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62. V.A 『Happy Rock Christmas』 (2006.11)
- 「Last Christmas」 (노래)

자신이 이끌던 사이렌 엔터테인먼트의 소속 밴드들과 함께 발표한 캐롤 앨범. 「White Christmas」가 수록되어 있다. 시즌 기획상품이 원래 그렇듯이, 그닥 특징적인 부분은 없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급조한 티가 많이 나는 앨범이다.

63. 신해철 『OST:영화 《쏜다》』 (2007.03)
- 프로듀싱

신해철의 마지막 영화음악이자, 창작자보다는 프로듀서의 역할에 집중한 작품이다. 국민체조 테마음악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한 트랙들을 제외하면, 당시 운영하던 사이렌 엔터테인먼트의 소속밴드들이 대거 참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버디무비, 탈주극의 뉘앙스에 맞추기 위해 질주하는 락/메탈 트랙을 의도적으로 배치한 듯도 하다. 옴니버스 스타일의 작품이 그렇듯 각 트랙들은 최선의 퀄리티를 보장하고 있으나, 하나의 음반으로 들었을 때는 싱글 모음집처럼 들리긴 한다. 영화의 좌충우돌 스토리와 어찌 보면 일맥상통할지도.

64. V.A 『D-War Special Tribute Album:Legend of Dragon』 (2007.07)
- 「Virgin Flight」 (글/곡/노래)

논란의 영화 《D-War》의 주인공(!) 이무기의 테마곡. 신해철은 지승호와의 인터뷰집 《쾌변독설》에서 사후 OST 개념의 헌정앨범을 영화 제작사의 러브콜을 받고 단지 '재미있겠다' 싶어서 맡았다고 밝힌 바 있다. 「Virgin Flight」는 「Lazenca, Save Us」에서 구사했던 콰이어(choir)식 합창을 수미쌍관으로 배치하여 웅장함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을 택했다. 영화 개봉 전에는 웅장한 그래픽이 지배하는 영화로 포장되어 있었으니, 이도 무리는 아니다. (뒤에 벌어진 거대한 논란은 아마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본작에는 넥스트 외에도 앤썸, 사일런트아이, 지하드 등 당시 헤비메탈/하드코어 계통의 네임드 밴드들이 용쟁호투를 벌이고 있는 '예상치 못한' 앨범이었다.

65. V.A 『Ghost On Summer』 (2007.08) / 66. 루비라이트 『Winterless』 (2009.12)
- 「여름이야기」 (글)

사이렌 엔터테인먼트에서 '여름 노래 리메이크'로 기획한 앨범에 수록된 음악이다. 루비라이트의 음악은 보사노바에 기반을 둔 상큼발랄 팝으로 정의하면 대략 비슷하며, 「여름 이야기」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이후 2009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에도 실린 바 있다. 하지만, 이 곡은 차태현이 리메이크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원곡자 김재홍의 항의는 차태현 보다는 신해철이 직접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곡의 발표 후에도 1년 이상 본인에게 연락이 없었던 점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차태현의 리메이크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후 언론을 통한 입장표명이 별도로 있진 않았다. 다만, 김재홍이 《MBC 스페셜》을 통해 무한궤도 당시의 신해철을 추억하는 인터뷰를 한 것으로 놓고 보면 잘 해결된 것이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67. 체리필터 『Remake & Rewind』 (2007.09)
- 「눈동자」 (글/곡)

섹시와 몽환을 사방천지에 깔아두는 원곡의 뉘앙스를 체리필터와 조유진은 캣우먼이 떠오를만큼 앙칼진 분위기로 바꿔버렸다. 조유진의 날카로운 보컬톤을 감안한 편곡일텐데, 과거 여러 팀이 해왔던 「눈동자」의 리메이크 중 가장 자신들의 색깔이 뚜렷한 리메이크라 해도 되겠다. 이런 부분들을 감안할 때, 체리필터는 지금보다 더 많은 대중과의 접촉과 피드백을 받을 자격이 있는 팀이다.

68. 신해철 『Remembrance』 (2008.07)
- 「Playboy의 최후」 (글/곡/노래)

지난 베스트와는 달리 하드록/팝록/발라드/신스팝&일렉트로니카로 구분하여 50트랙이 빼곡히 담겼다. 첫 베스트까지는 15년이 걸렸는데 두번째 베스트가 6년이라니. 뭔가 외국에서나 보는 원로가수 베스트를 보는 느낌이 없지 않다. (민망해서 은근슬쩍 신곡 하나를 꽂아넣었을지도.) 블루지한 기타 스트록으로 시작해 소리의 레이어를 점층적으로 쌓아나가는 방식으로 구성된 신곡 「Playboy의 최후」는 팝록의 전범을 보여주는 괜찮은 싱글로 『개한민국』에 수록되었더라도 크게 이질감이 없었을 것이다. 보컬톤으로만 보면 『개한민국』 당시에 녹음된 곡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후렴부에서는 Skid Row의 「Youth Gone Wild」가 언뜻 떠오르며, 지고지순한 사랑에 빠진 파락호의 자기 합리화(?)에 가까운 가사도 재미있다. (쌩뚱맞게 신스팝&일렉트로니카 부문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는 주의하자.)

69. 신해철 『OST:게임《워렌전기》』 (2011.09)

(언제인지는 알 수 없는) 같은 소속사 동료였던 김가연의 소개로 참여한 OST이다. 게임음악 계보로서의 전작 『길티기어』에서는 대전격투게임에 어울리도록 록/메탈로 스코어를 구성했다면, 본작에서는 오케스트레이션 편곡으로 MMORPG에 어울리는 '중세풍' 멜로디의 향연을 선보인다. 그가 《워렌전기》 사이트에서 밝힌 바 있듯, '게임을 위해 음악을 만든다'는 주관을 확실하게 투영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트랙들이 전부 미디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기억 포인트중 하나. 신해철의 주특기는 결국 '자신이 만족하는 고퀄리티'에 수렴하는 게 아닐까.)

70. 자우림 『나는 가수다』 (2011.09)
- 「재즈카페」 (글/곡)

신해철의 음악을 가장 효과적으로 리메이크한 것을 찾는다면 필자는 이 싱글을 꼽겠다. 미디로만 작업한 원곡의 매력이 리메이크 당사자의 색깔만 확실하다면 리메이크의 목적과 더불어 원곡이 지닌 아우라도 함께 뻗어나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매력적인 음색으로 뱉는 김윤아의 스캣이 이선규의 기타와 주거니받거니 하는 간주 부분을 지나, 커먼그라운드의 박진감있는 혼세션이 더해진 후반부는 이 판단에 확신을 더한다. 과잉을 유도하는 예능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가능한 리메이크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71. V.A 『脫傷:노무현을 위한 레퀴엠』 (2012.10)
- 「Goodbye Mr.Trouble」 (글/곡/노래)

각종 매체에 노무현 대통령의 찬조 연설 등을 통한 지지를 표명했던 신해철은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공식적인 활동을 멈췄고, 3년 후 강헌과 함께 『脫傷』의 프로듀서를 맡으면서 대중음악계로 복귀한다. 가사로 선택된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겨 볼수록 숙연해지는 곡으로, 어떤 음악적인 배경 설명도 이 곡 앞에서는 단지 신기루일 뿐이다.

72. 넥스트 『I Want It All : Demo 0.7』 (2014.09)
- 「I Want It All」 (글/곡/노래)

『Reboot Myself Part.1』으로 복귀의 서막을 연 신해철은 여세를 몰아 재결성한 넥스트의 명의로 디지털 선공개 싱글을 발표했다. 신디사이저 백킹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다 단도직입적으로 쏘아붙이는 후렴구는 그의 멜로디 메이킹 능력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후반부 적재 적소에 활용한 오토튠 및 이현섭과의 트윈 보컬 배틀 등 신해철하면 떠오르는 모든 클리쉐 아닌 클리쉐가 한 곡에 녹아들어가 있으되, 현재의 트렌드를 적절히 융합하는데 성공했다. 후렴구에 관객의 떼창을 믹스해서 넣고 싶다는 소박한 바램으로 선공개된 싱글인데, 그게 이 정도라면 정규반의 질은 충분히 짐작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가 떠났다.

73. 신해철 『Reboot Yourself』 (2014.12)
- 「Pink Monster」 (글/곡/노래)

그는 생전 100여곡 이상의 미발표곡을 작업해두었으며, 그 중 괜찮은 것들로 앨범을 구성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통산 3번째 베스트 앨범 『Reboot Yourself』는 지난 베스트와는 달리 장르별 분류를 해두진 않았으나, 트랙 구성으로 보면 록 성향의 강도에 따라 배분한 듯한 인상을 준다. 유일한 신곡이자 유작 「Pink Monster」는 마치 할머니가 아이들을 재우기 전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는 것과 같은 동화같은 가사가 인상적이다. 서태지도 그러했듯, 아버지가 된 신해철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이들과의 '현재'를 기억하는 동요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있었더라면 그냥 스쳐지나갔겠지만 홀연히 떠난 지금이기 때문에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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