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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한국 대중음악과 시티팝 사이의 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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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습관처럼 SNS에 로그인하다 「원조 '시티팝'의 변신, 장필순 새 앨범이 기대되는 이유」(2020.4.7, 오마이뉴스 [링크]) 라는 제목의 기사를 접했다.

장필순의 신보 『Soony Re:work-1』(2020) 에 대한 기사를 챙겨보는 편이지만, 이 기사의 제목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마, 언론사 편집부에서 헤드라인을 뽑았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했다. 하지만, 기사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었다.
 
“가장 흥미를 끄는 트랙은 첫 곡으로 등장하는 '어느새'이다. 발표 당시 작곡자 김현철의 역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소위 원조 "시티팝"으로 불리던 원작의 도시적 감성을 30년만에 상당 부분 제거하고 Lo-Fi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사운드) 스러운 분위기로 탈바꿈한다.”
 
질문이 꼬리를 물며 맴돌았다. 시티팝? 왜 여기서 이 단어가 등장하는 거지? 작곡자가 최근 ‘시티팝의 아버지’라는 새로운 별칭을 얻은 김현철이어서? 「어느새」(1989)까지 시티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티팝이란 단어를 너무 남용하는 것 아닌가? 이 반발심(?)은 사실 이 날 처음 생긴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 뮤지션들은 물론 음악관계자, 평론가들까지 과거의 한국 가요를 두고 시티팝이라는 용어를 너무 쉽게 가져다 쓰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일본 시티팝의 한국 유행 이후부터 계속 가졌기 때문이었다.

과연, 우리 나라에 ‘시티팝’이라 말할 수 있는 음악이 존재했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한동안 나는 이런 혼동을 일으킨 기폭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어왔다. 최근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일본 시티팝의 재발견’ 분위기는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며, 주변에서는 벌써 지쳤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근데 우리에게는 ‘절대로 일본에게 지면 안돼!’라는 어떤 본능과 같은 정서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걸까. 일본음악 매니아들에게 오랜만에 쾌감을 선사하는 과거의 장르 ‘시티팝’에 대한 트렌드를 두고, 한국의 음악시장은 본류를 파고들기보다 한국의 과거 음악들 속에서 그와 유사한 것을 찾는데 더 골몰하는 모습들이 많이 느껴졌다.

 

마리야 타케우치(竹内まりや) 「Plastic Love」(1984)  

 
대표적인 사례가 네이버문화재단-온스테이지가 기획한 《디깅클럽서울 2019》시리즈였다. 이 시리즈는 스텔라장이 윤수일의 「아름다워」(1984)를 커버하고, 죠지가 김현철의 「오랜만에」(1989)를 커버하는 등 현재의 인디 뮤지션들이 과거 8090시대의 가요를 시티팝의 분위기로 커버해 부르는 싱글 프로젝트였고, 음악팬들의 반향도 꽤나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이 시리즈는 양면성을 지닌 기획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 8090 가요의 숨은 보석들을 젊은 세대에게 재평가받게 해준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이 기획으로 커버한 곡들 때문에 대중이나 (심지어 일부 음악관계자들까지도) '시티팝'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 게다가, 아티스트에 아무런 문의 없이 비슷한 뉘앙스를 지닌 곡들을 '시티팝'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텔라장 「아름다워」(2019)  
 
물론 이런 오류가 몇몇 호사가들의 주도로만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유행에 민감한 한국 애호가들 사이에서 일본 시티팝 다시 듣기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이어서 음악팬들과 음악관계자들 중심으로 한국의 8090 가요 중 쇼와(昭和) 시대의 일본 시티팝의 분위기나 편곡 스타일이 흡사한 가요를 발굴하는 일련의 흐름이 나타났다. 그 중, 김현철과 빛과소금 등이 언론에 의해 '한국 시티팝의 아버지'란 호칭을 새롭게 얻기도 했다. 어쨌든 이런 흐름이 있었기에 서울레코드페어에서 빛과소금의 LP 박스세트 『The Complete Studio Albums』(2019)가 재발매되었고, 김현철은 《복면가왕》 패널을 넘어 정규 앨범으로 컴백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자신이 가수임을 재확인시켰다. 그러니, 나름 가요계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창 일본에서 시티팝으로 지칭되는 음악들이 유행하던 1980년대는 ‘빽판’(편집자註. 저작권 보유 회사와 라이센스 계약 없이 불법으로 제작한 음반)조차도 그런 음악들을 다루지 않았다. 일본 평론가들이 분류한 '시티팝'의 범주에 속하는 아티스트들 중 한국에 알려진 아티스트라면 그나마 T-Square(1976~) 정도일 텐데, 이들은 시티팝 보다는 퓨전재즈로 분류하는 게 더 맞지 않나 생각한다.

 
T-Square 「Takarajima(宝島)」(2004, Casiopea vs. The Square Live)  
 
여기서 우리는 ‘8090가요 중 일본 시티팝의 분위기와 편곡이 흡사한 곡들’에 대해 "한국의 시티팝"이라는 정의를 섣불리 부여하기 전에 몇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디깅클럽서울 2019》의 관계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 진지한 접근을 하지 않았다. 설사, 한국 가요를 잘 아는 일본인 뮤지션들이나 반대로 일본음악을 매우 잘 아는 한국의 음악 애호가가 "야, 이거 한국식 시티팝인데?"라고 감탄했다고 해서 그게 한국에서 ‘잊혀진 과거의 장르 중 하나’라고 쉽게 규정할 수 있을까?
 
적어도 "한국의 시티팝"이라는 음악적 사조가 있었음을 증명하려면 다음의 명제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한국의 시티팝’을 구사한 것으로 지목받은 아티스트들은 창작의 레퍼런스로 일본 시티팝 계열의 아티스트들이 발표한 음악을 실질적으로 접했던 것일까? 또한, 당시의 세션 연주자와 편곡자들은 녹음할 때 어떠한 장르적 기반을 바탕으로 편곡과 연주를 진행한 것일까?
 
이러한 흐름의 원류에 대해서는 당시의 창작자·연주자를 직접 인터뷰하지 않고서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규정은 다수의 아티스트 및 음악관계자에 대한 인터뷰 및 조사에 기초한 기억의 재구성을 이뤄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한국 8090 가요 안의 '시티팝 찾기'는 그저 일본 시티팝과 편곡적 분위기가 비슷한 곡들만을 찾아내는 것으로 끝날 뿐이다. 나 또한 그런 곡들을 모아서 즐겨 듣고 있지만, 우리 가요 역사 속에 ‘시티팝’ 이라는 장르가 있었다고 함부로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빛과소금 「오래된 친구」(1994)  


실제 내 주변 평론가들중 일부는 김현철과 빛과소금을 갑자기 시티팝으로 묶는 것에 부정적 시선을 가진 이들도 있다. 물론 그동안의 언론 인터뷰 등을 볼 때 자신들의 음악에 ‘시티팝’의 호칭을 붙이는 것에 그리 거부감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발표 후 30년 넘는 시간이 흘렀기에 다시 긍정적 조명을 받는 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음악 기사를 쓰는 음악 기자들, 음악을 비평하는 사람들이라면 특정한 양식을 지닌 가요에 대해 '시티팝'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것은 보다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뒤엉킴이 생기는 이유는 시티팝이라는 트렌드가 단순히 하나의 음악적 스타일로 완벽하게 정의되지 않는 '잡탕'과 같은 성격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일본인들이 시티팝이라는 흐름을 형성할 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서구식 AOR’이라고 부르는 서양 대중음악의 범주 에는 소울-훵크적 요소, 깔끔한 소프트 팝/록, 퓨전/스무드 재즈의 부드러운 낭만주의, 변박을 활용하는 연주의 기술적인 부분까지 임의로 묶여있다. 결국, 그런 스타일들을 선호한 당대의 일본 뮤지션들이 버블 경제 속에서 '도회적 정서의 낭만'을 그리기 위해 자신들의 로컬 음악에 이식한 게 80년대 일본의 시티팝이니까.

그러고 보면, 엔카·가요코쿠(演歌·歌謡曲, 필자註. 엔카는 전통 5음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대중음악이며, 가요코쿠는 2차대전이후 쇼와시대까지 주류를 이룬 일본 대중음악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70년대 이후 등장한 뉴포크·록 등의 음악이 서양 대중음악의 장르적 특성에 충실하고자 한 것과는 달리, 이 음악들은 일본 전통 음계의 영향아래 있었다)특유의 ‘뽕기’가 완벽하게 제거된 서구적 사운드의 이식이 당시 일본 대중음악계가 추구하던 궁극의 목표였으니, 동아기획/하나뮤직/90년대 초반 작가주의 가요들과 일본 시티팝의 교집합이 존재했다면 오히려 그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 한국 가요가 그런 '도회적 느낌'을 제시한다고 해서 당시의 사정을 외면하고 '시티팝'이라고 말한다? 그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디깅클럽서울2019》시리즈에서 백예린이 커버한 「어느새」(2019)는 재편곡 과정에서 일본 시티팝의 기법이나 감성을 그대로 가져왔다. 당연히 이 곡 자체를 시티팝이라 불러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김현철이 만들고 장필순이 노래한 원곡이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보사노바 리듬을 탄탄하게 갖추면서도 라틴 재즈의 영향을 받아 완성한 팝 트랙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한 것 아닌가?
 
백예린 「어느새」(2019)  


물론, 요즘의 뮤지션들이 일본 시티팝을 직접 구해 듣고, 그 매력에 반해서 자신들의 음악에 당시의 요소들을 반영하는 건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일본 자국 내, 유럽, 심지어 미국에서도 인디 뮤지션들 가운데 이러한 음악적 요소를 반영하는 아티스트들이 꽤나 많다. 즉, 이러한 분위기는 소위 '시티 팝 리바이벌'이라는 세계적 유행의 흐름에 우리의 아티스트들도 동참한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음악을 장르적으로 재정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어적 규정의 진지함과 신중함이 필요하다. 여러 음악관계자들의 노력이 함께 해야만 '한국의 시티팝'이라는 용어 사용이 합당한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필순 「어느새」(1989)  
 
장필순 「어느새」(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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