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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으로 만든 음악.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 김선중(케이맨)을 만나다.
- 음악 정보
김선중.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 젊었을 때 토미 앨드리지를 좋아했고 이승철부터 조성모까지, 8090을 대표하는 굵직한 뮤지션들과 세션, 투어 멤버로서 많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의 이름은 케이맨(K.man)이다. 케이맨은 박상민, 소찬휘의 피처링을 앞세워 지난 5월 24일 정규 앨범 『I`ll Be There』도 냈다. 최고의 드러머이면서 드럼 솔로 앨범은 지양한다는 그. 들어보니 꽤 깊은 속사정이 있었다. 《음악취향Y》에서 그 비화를 들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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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대(이하 ‘김’) 드럼이 첫 악기였나요?
김선중(이하 ‘케이맨’) 처음엔 부는 악기(색소폰)를 하려고 했어요. 진주중학교 시절, 밴드부에 들려고 했더니 부모님 허락을 받아 오라더라고요. 근데 옛날엔 폐병이 많아 부모님이 그건 죽어도 안 된다 하셨죠. 그래서 부는 악기 말고 뭐가 있나, 하고 보니 작은북이 있더라구요. 중학교 3학년 때 남강 다리 쪽에 드럼 학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기본기를 조금 익히고 나머지는 독학으로 했습니다. 당시엔 밴드부 선배들 말고는 드럼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김 프로 세계에 빨리 발을 담그신 걸로 압니다.
케이맨 《월간팝송》이란 잡지가 있었는데 끝에 ‘구인구직’란에 보면 주로 위쪽(서울 경기) 사람들이 멤버를 많이 구하고 있었어요. 그 땐 거의 헤비메탈이었죠. 고 2때였나, 뮤즈에로스라는 메탈 프로젝트에 제가 연락을 취하고 그 쪽에서 오디션 한 번 보자고 해 서울로 갔었어요. 갔더니 첫 마디가 “투베이스(더블 베이스 드럼) 밟을 줄 아냐”길래 “네, 잘 합니다. 지금도 연습하고 있구요”라고 했어요. 그 분들은 주로 AC/DC나 W.A.S.P. 같은 밴드를 동경했는데, 잼 한 번 해보자 하더라고요. 홍키통크(honky-tonk) 스타일로 조금 하다가 더블 베이스 밟았는데 마음에 든다네요. 그런데 그 오디션이 뮤즈에로스가 아닌, 메탈 프로젝트 산하에 있는 다른 밴드 드러머를 구하는 자리였어요. 그래서 뮤즈에로스에 들어가려 했던 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죠. 나중에 정현철(기타, 들국화)씨 때문에 서울로 또 오긴 했지만. 자기 ‘사부’가 밴드를 소개해줬는데 거기서 제 얘길 했나 봐요. 그래서 짐을 쌌는데 어머니께서 현찰로 당시 돈 350만원을 속옷에 말아 주셨어요. 그 돈으로 270만 원 짜리 펄(pearl) 드럼 세트와 페이스트 심벌 세트를 샀습니다. 당시 팀이 무당의 지해룡씨가 있던 ‘락코리아’라는 클럽 밴드였는데 4인조로 시작했어요. 87년도 에버랜드, 그러니까 당시 ‘자연농원’ 장미축제에 매일 출근하면서 저녁 공연을 4개월 정도 무급으로 했는데, 그 땐 뭐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어도 충분했으니까. ‘이름 없는 새’ 부른 손현희씨도 게스트로 나오고 그랬죠. 그리고 그 때 명함을 주면서 “스타로 만들어줄 테니까 자기 밴드로 들어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때만 해도 ‘의리’를 중시했던 터라, 지금 밴드가 좋다고 거절했는데 나중에 혹시 마음 변하면 오라더라구요.
김 그게 누구였나요?
케이맨 이선희씨 남편 분의 형이었어요. 사실 계속 있기로 한 기존 밴드가 일주일 뒤 해산했는데, 그렇게 자연스레 ‘이선희와 한강’에 합류하게 된 거죠. 그게 제 공식 프로 데뷔였습니다.
김 좋아하는 드러머가 궁금합니다.
케이맨 Tommy Aldridge (現. White Snake)를 좋아했어요. 저와 스타일도 비슷했고. 사실 예전처럼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시키고 비디오 영상 신청해 보던 것과 달리, 요즘 드러머들은 유튜브 등 볼 게 너무 많아 한 가지를 파지 못 하는 것 같아요. 중심도 없고. 봐서 멋있으면 카피 한 번 해보는 데서 그치는 정도죠.
김 음, 의외네요. 저는 아키라 짐보(神保彰, 前. Casiopea)나 Jeff Porcaro (前. Toto) 쪽을 좋아하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케이맨 그 쪽은 나중에 조금씩 좋아했어요. 드럼 악기는 ‘리듬’이다 보니 리듬의 기분, 이른바 ‘그루브’라는 건 본인이 연주하면서 느끼고 성숙해져야지 가르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연주(합주)를 많이 해봐야, 경험을 많이 해야 생기는 거라서. 그루브는 공부해선 안 생겨요.
김 그루브는 배울 수 없다?
케이맨 그렇죠. 물론 재능도 있겠지만. 음악에 맞게끔 그루브를 내려면 본인이 해보지 않고선 못 내요. 연주 많이 하다 보니 알게 됐죠 저도. Jeff Porcaro를 처음엔 몰랐어요. 언론에서 최고라고 떠들어도. 뒤에 연륜이 쌓이면서 그루브감이 생긴 뒤 아, 대단한 사람이구나, 알게 된 거죠.
케이맨의 최애 드러머. 여전히 정정하신 Tommy Aldridge 옹
김 연습을 많이 하실 때는 어느 정돈가요?
케이맨 고 1때부터 별 일 없으면 하루 3~4시간은 매일 했어요.
김 지금두요?
케이맨 네, 지금도. 학원 나가면 연습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저예요. 애들이 아니라(웃음).
김 아니 그게 무슨(웃음)
케이맨 습관이 들다 보니까. 연습 안 하면 몸이 뻣뻣해지는 것 같고. 자신감도 떨어지고.
김 세션 생활도 꽤 하신 걸로 압니다.
케이맨 87년도 이선희 밴드에 들어가면서 서울스튜디오에서 레코딩이란 걸 해봤어요. ‘아름다운 강산’과 ‘안녕’을 제가 쳤죠. 나머지는 다른 세션 분들이 쳤고. 그러다 89년도에 클럽 생활을 1년 정도 하고, 90년도에 역삼동 쪽 아는 형들과 반주와 영상을 넣은 레이저디스크 녹음 작업을 했는데 한 600곡 했나. 그러면서 레코딩 공부가 자연스레 됐어요. 지금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지만 이후 ‘뮤직파티’라는 곳에 있다 나와서 세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김 세션 활동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따로 있는지?
케이맨 워낙 많이 해서(웃음). 이름도 모르고 그냥 가서 해줬죠. 요즘엔 크레딧에 연주자들이 다 기록되지만 그 땐 대충대충 했으니까. 당장 떠오르는 사람들이 이승철과 미래들, 이승환과 휴먼, 조관우씨 대박 났을 때 투어 몇 년 돌았고. 그리고 지구레코드에서 나온 조성모의 「To Heaven」(1998)도 제가 쳤구요. 그게 또 대박이 났고, 나중엔 투어까지 함께 돌았죠.
김 많이 하셨네요.
케이맨 뭐, 그게 다였죠.
김 그래도 굵직굵직한 세션들이라.
케이맨 그냥 운이 따라줬던 것 같아요. 당시엔 드럼 잘 치시는 분들은 죄다 (나이트)클럽에 있었어요. 가요 안 하고 팝송 하던 시절이라. 가요 세션 쪽엔 별로 인물이 없었어요. 제가 좀 특이하고 하니까 많이 불러주신 것 같아요. 역시 경험이 중요해요.
김 요즘엔 그런 기회가 많이 없죠.
케이맨 클럽이 없잖아요. 그 땐 진주에만 해도 클럽이 40~50군데는 있었을 걸요. 베이스, 드럼, 키보드, 기타, 싱어까지. 한 곡에 천 원씩 받으면서 해주고.
김 아, 진주에도 그렇게 많은 클럽들이?!
케이맨 그러니 전국적으론 얼마나 많았겠어요. 왜 지금 음악 동호회들 많잖아요. 그게 다 옛날에 한 가닥 하신 분들이에요. 생업에 종사하시다 옛 시절이 그리워 다시 하시는 거죠.
드럼의 고수들은 거기에 있었다. (영화 《와이키키브라더스》(2001)의 한 장면)
김 분위기를 바꿔 위대한 탄생 얘기 좀 하겠습니다. 조용필씨와 첫 만남은 어땠나요?
케이맨 91년도에 가라오케 하던 형들 따라 가서 처음 뵀는데. 그 때 제 나이가 26살이었어요. 조용필 형님은 그냥 뭐 ‘하늘’이었죠. 저랑 17살이 차이 나니까.
김 드러밍엔 만족하시던가요?
케이맨 그냥 본인 노래하기 편한 정도로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93년도에 밴드가 깨지고 구하는 과정에서 저와 키보디스트 둘만 남으라 하셨는데. 진주 사람들 또 의리 있잖아요(웃음). 안 한다 그러고 나온 거예요.
김 이후 다시 들어가신 거죠?
케이맨 네, 2004년도에. 중간에 2~3차례 러브콜이 있긴 했는데, 저도 나름 바쁘게 활동하고 있던 터라. 2003년도에 세 번째 러브콜이 왔을 때 ‘지금 안 가면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합류한 거예요. 그것도 벌써 12년 전 얘기네요.
김 곁에서 본 조용필은 어떤 사람인가요?
케이맨 완벽한 삶을 추구하시는 분?
김 음악 외 ‘인생’도 완벽하게?
케이맨 일단 뭐든지 ‘음악’이니까요. 요즘 가수들이 연습을 안 하잖아요. 과거 잘 나가던, 이름은 못 밝히겠는데, 그 사람들도 옛날엔 찰랑찰랑 했지만 지금은 완전 갔거든요. 조용필 형님은 지금도 매일 연습해요. 몇 시간씩.
김 새 앨범 얘기 좀 하겠습니다. 어떻게 나오게 된 겁니까?
케이맨 음반 쪽으로 손을 댄 건 지금부터 7년 정도 됐는데. 처남이 노래를 했어요. 그러니까 조관우씨 외사촌. 조통달 명인의 조카죠. 저희 장모님께서 조명인의 여동생이시거든요. 한때 조관우씨가 키워주려고 하다가 잘 안 됐고, 7년 전에 저한테 전화가 와서 마지막으로 앨범을 한 장 내고 싶대요. 무슨 앨범, 했더니 트로트 앨범을 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 내가 내줄 순 있는데 다른 기획사처럼 빵빵하게는 못 밀어준다, 대신 힘닿는 데까진 홍보를 해주겠다, 클럽 무명 가수보단 나을 거니까 열심히 해봐라. 그렇게 제작자로 시작했어요. 오유비라고, 음원 사이트에 검색해보면 나올 거예요. 《전국노래자랑》, 《도전1000곡》, 《가요무대》, 라디오 할 것 없이 다니며 홍보를 했는데, 이게 트로트 앨범을 들고 다니니까 PD들이 아는 척을 안 하더라구요.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2013년도에 기존과 다른 느낌으로 처남 앨범을 만들어줬는데, 이름도 오유비가 아닌 원가호라는 본명으로 갔어요. 그러면서 인지도를 올려보려 한 거죠.
김 제 생각엔 처음부터 ‘김선중’이라는 이름을 강조해 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인지도가 훨씬 있으시니까.
케이맨 당시에는 내 이름으로 낸다고 생각 안 했죠. 처남 걸 내준다고 생각한 거니까. 그런데 처남이 개인 사정으로, 지난해에 통보하듯 그만 둔다고 하더라구요. 조금 서운했죠. 그 동안 투자하고 뿌린 게 얼만데. 지금도 마음을 많이 풀었다곤 해도 좀 쌓여있어요. 「I’ll be there」라는 곡도 박상민씨가 하기로 한 건데 녹음 전날 매니저가 전화 와서 못 하겠다 하더라고요. 랩퍼도 다 잡아놨고, 코러스와 녹음실 일정을 전날에 캔슬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 그래서 막무가내로 제가 부른 거예요.
정규앨범 타이틀곡 「I'll Be There」 M/V
김 원래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에 관심이 있었나요?
케이맨 아니에요. 프로듀싱을 잘 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는데, 회사가 그리 크지 않고, 제작을 하다 보니 작사, 작곡, 편곡, 녹음실 잡는 일까지 제가 다 하게 된 겁니다. 엔지니어와 상의해서 소리 잡고, 프로듀싱 개념으로 다 해버린 거죠. 처음엔 노래 소리만 크기도 했고(웃음). 주위에선 드럼에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 하는데, 전 사실 드럼에 제일 신경을 안 쓰거든요. 그냥 심플하게.
김 「땡땡이」 프리 솔로는 심플하지 않던데요(웃음).
케이맨 아, 그건 나름 드러머니까 내가 만든 노래에, 세상에 없는 음악을 한 번 만들어보자 해서 솔로를 입혀본 거죠. 세션 가서 남 노래 하는데 그러면 욕먹어요(웃음).
김 드럼 솔로 앨범은 내실 생각이 없으신지?
케이맨 사실 드럼 앨범을 내면 우리 식구들에게만 줘야죠. 게다가 고난도의 코드웍 없인 그런 연주 앨범은 못 만들어요.
김 욕심이 없으신 건가요?
케이맨 네, 그런 욕심은 없어요. 인터넷만 봐도 저보다 잘 치는 드러머들 너무 많잖아요. 사람들은 그런 연주자들 드럼 솔로 앨범을 듣겠지, 제 거 듣겠어요. 모르지, 큰 기획사에서 앨범 내주고 프로모션까지 다 해준다면야 몰라도.
김 그런 제안이 없었나요?
케이맨 연주곡 앨범에 그렇게 투자하는 곳은 없죠.
김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의 컨셉이랄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케이맨 일단 많은 분들이 들어줬으면 좋겠구요. 음반 시장이 없고, 그나마 있는 음원 시장도 ‘되는 사람들’ 빼곤 없는 식이어서. 큰 바람은 없어요 사실. 그저 내 나이 또래 아빠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생각, 아빠의 잔소리?(웃음) 일종의 인성교육이랄까. 그게 컨셉이라면 컨셉이겠네요.
김 타겟을 부모층으로 잡아도 괜찮겠는데요?
케이맨 실제 행사를 다니면서 보면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더라구요. 사실 안 좋은 노래는 없잖아요. 얼마나 알려지느냐가 문제지. 최대한 노력을 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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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같아 선중 형님과 ‘형, 동생’을 먹었는데 이 날 인터뷰 마지막에 형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원가 100원짜리 볼펜을 만들면 돈을 못 벌더라도 원가 100원은 나와야 하는데, 앨범 한 장 내려고 1,000만원 들이면 한 달에 4만원 벌기가 힘들다는, 그래도 앨범은 계속 해나갈 거라는 얘기였다. ‘한류’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방송되고 있는 《뮤직뱅크》 시청률이 1.5%를 밑도는 지금, 10년 후엔 아이들이 적어져 아이돌이 힘들어질 거라는 형님의 예상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다 보면 ‘성인 시장’이 살 것이고, 시장 판도는 그런 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수요가 없으면 수십억 쏟아 붓는 아이돌도 어쩔 수 없는 시장이 될 거라는 그 말. 이 바닥 ‘30년 짬밥’에서 나온 조용한 일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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