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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으로 만든 음악.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 김선중(케이맨)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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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정보

김선중.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드러머. 젊었을 때 토미 앨드리지를 좋아했고 이승철부터 조성모까지, 8090을 대표하는 굵직한 뮤지션들과 세션, 투어 멤버로서 많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리고 지금 그의 이름은 케이맨(K.man)이다. 케이맨은 박상민, 소찬휘의 피처링을 앞세워 지난 5월 24일 정규 앨범 『I`ll Be There』도 냈다. 최고의 드러머이면서 드럼 솔로 앨범은 지양한다는 그. 들어보니 꽤 깊은 속사정이 있었다. 《음악취향Y》에서 그 비화를 들으러 갔다.


***


김성대(이하 ‘김’) 드럼이 첫 악기였나요?


김선중(이하 ‘케이맨’) 처음엔 부는 악기(색소폰)를 하려고 했어요. 진주중학교 시절, 밴드부에 들려고 했더니 부모님 허락을 받아 오라더라고요. 근데 옛날엔 폐병이 많아 부모님이 그건 죽어도 안 된다 하셨죠. 그래서 부는 악기 말고 뭐가 있나, 하고 보니 작은북이 있더라구요. 중학교 3학년 때 남강 다리 쪽에 드럼 학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기본기를 조금 익히고 나머지는 독학으로 했습니다. 당시엔 밴드부 선배들 말고는 드럼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프로 세계에 빨리 발을 담그신 걸로 압니다.


케이맨 《월간팝송》이란 잡지가 있었는데 끝에 ‘구인구직’란에 보면 주로 위쪽(서울 경기) 사람들이 멤버를 많이 구하고 있었어요. 그 땐 거의 헤비메탈이었죠. 고 2때였나, 뮤즈에로스라는 메탈 프로젝트에 제가 연락을 취하고 그 쪽에서 오디션 한 번 보자고 해 서울로 갔었어요. 갔더니 첫 마디가 “투베이스(더블 베이스 드럼) 밟을 줄 아냐”길래 “네, 잘 합니다. 지금도 연습하고 있구요”라고 했어요. 그 분들은 주로 AC/DC나 W.A.S.P. 같은 밴드를 동경했는데, 잼 한 번 해보자 하더라고요. 홍키통크(honky-tonk) 스타일로 조금 하다가 더블 베이스 밟았는데 마음에 든다네요. 그런데 그 오디션이 뮤즈에로스가 아닌, 메탈 프로젝트 산하에 있는 다른 밴드 드러머를 구하는 자리였어요. 그래서 뮤즈에로스에 들어가려 했던 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죠. 나중에 정현철(기타, 들국화)씨 때문에 서울로 또 오긴 했지만. 자기 ‘사부’가 밴드를 소개해줬는데 거기서 제 얘길 했나 봐요. 그래서 짐을 쌌는데 어머니께서 현찰로 당시 돈 350만원을 속옷에 말아 주셨어요. 그 돈으로 270만 원 짜리 펄(pearl) 드럼 세트와 페이스트 심벌 세트를 샀습니다. 당시 팀이 무당의 지해룡씨가 있던 ‘락코리아’라는 클럽 밴드였는데 4인조로 시작했어요. 87년도 에버랜드, 그러니까 당시 ‘자연농원’ 장미축제에 매일 출근하면서 저녁 공연을 4개월 정도 무급으로 했는데, 그 땐 뭐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어도 충분했으니까. ‘이름 없는 새’ 부른 손현희씨도 게스트로 나오고 그랬죠. 그리고 그 때 명함을 주면서 “스타로 만들어줄 테니까 자기 밴드로 들어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때만 해도 ‘의리’를 중시했던 터라, 지금 밴드가 좋다고 거절했는데 나중에 혹시 마음 변하면 오라더라구요.


그게 누구였나요?


케이맨 이선희씨 남편 분의 형이었어요. 사실 계속 있기로 한 기존 밴드가 일주일 뒤 해산했는데, 그렇게 자연스레 ‘이선희와 한강’에 합류하게 된 거죠. 그게 제 공식 프로 데뷔였습니다.


좋아하는 드러머가 궁금합니다.


케이맨 Tommy Aldridge (現. White Snake)를 좋아했어요. 저와 스타일도 비슷했고. 사실 예전처럼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시키고 비디오 영상 신청해 보던 것과 달리, 요즘 드러머들은 유튜브 등 볼 게 너무 많아 한 가지를 파지 못 하는 것 같아요. 중심도 없고. 봐서 멋있으면 카피 한 번 해보는 데서 그치는 정도죠.


음, 의외네요. 저는 아키라 짐보(神保彰, 前. Casiopea)나 Jeff Porcaro (前. Toto) 쪽을 좋아하셨을 거라 생각했는데.


케이맨 그 쪽은 나중에 조금씩 좋아했어요. 드럼 악기는 ‘리듬’이다 보니 리듬의 기분, 이른바 ‘그루브’라는 건 본인이 연주하면서 느끼고 성숙해져야지 가르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연주(합주)를 많이 해봐야, 경험을 많이 해야 생기는 거라서. 그루브는 공부해선 안 생겨요.


그루브는 배울 수 없다?


케이맨 그렇죠. 물론 재능도 있겠지만. 음악에 맞게끔 그루브를 내려면 본인이 해보지 않고선 못 내요. 연주 많이 하다 보니 알게 됐죠 저도. Jeff Porcaro를 처음엔 몰랐어요. 언론에서 최고라고 떠들어도. 뒤에 연륜이 쌓이면서 그루브감이 생긴 뒤 아, 대단한 사람이구나, 알게 된 거죠.



케이맨의 최애 드러머. 여전히 정정하신 Tommy Aldridge 옹


연습을 많이 하실 때는 어느 정돈가요?


케이맨 고 1때부터 별 일 없으면 하루 3~4시간은 매일 했어요.


지금두요?


케이맨 네, 지금도. 학원 나가면 연습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저예요. 애들이 아니라(웃음).


아니 그게 무슨(웃음)


케이맨 습관이 들다 보니까. 연습 안 하면 몸이 뻣뻣해지는 것 같고. 자신감도 떨어지고.


세션 생활도 꽤 하신 걸로 압니다.


케이맨 87년도 이선희 밴드에 들어가면서 서울스튜디오에서 레코딩이란 걸 해봤어요. ‘아름다운 강산’과 ‘안녕’을 제가 쳤죠. 나머지는 다른 세션 분들이 쳤고. 그러다 89년도에 클럽 생활을 1년 정도 하고, 90년도에 역삼동 쪽 아는 형들과 반주와 영상을 넣은 레이저디스크 녹음 작업을 했는데 한 600곡 했나. 그러면서 레코딩 공부가 자연스레 됐어요. 지금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지만 이후 ‘뮤직파티’라는 곳에 있다 나와서 세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세션 활동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따로 있는지?


케이맨 워낙 많이 해서(웃음). 이름도 모르고 그냥 가서 해줬죠. 요즘엔 크레딧에 연주자들이 다 기록되지만 그 땐 대충대충 했으니까. 당장 떠오르는 사람들이 이승철과 미래들, 이승환과 휴먼, 조관우씨 대박 났을 때 투어 몇 년 돌았고. 그리고 지구레코드에서 나온 조성모의 「To Heaven」(1998)도 제가 쳤구요. 그게 또 대박이 났고, 나중엔 투어까지 함께 돌았죠.


많이 하셨네요.


케이맨 뭐, 그게 다였죠.


그래도 굵직굵직한 세션들이라.


케이맨 그냥 운이 따라줬던 것 같아요. 당시엔 드럼 잘 치시는 분들은 죄다 (나이트)클럽에 있었어요. 가요 안 하고 팝송 하던 시절이라. 가요 세션 쪽엔 별로 인물이 없었어요. 제가 좀 특이하고 하니까 많이 불러주신 것 같아요. 역시 경험이 중요해요.


요즘엔 그런 기회가 많이 없죠.


케이맨 클럽이 없잖아요. 그 땐 진주에만 해도 클럽이 40~50군데는 있었을 걸요. 베이스, 드럼, 키보드, 기타, 싱어까지. 한 곡에 천 원씩 받으면서 해주고.


아, 진주에도 그렇게 많은 클럽들이?!


케이맨 그러니 전국적으론 얼마나 많았겠어요. 왜 지금 음악 동호회들 많잖아요. 그게 다 옛날에 한 가닥 하신 분들이에요. 생업에 종사하시다 옛 시절이 그리워 다시 하시는 거죠.



드럼의 고수들은 거기에 있었다. (영화 《와이키키브라더스》(2001)의 한 장면)


분위기를 바꿔 위대한 탄생 얘기 좀 하겠습니다. 조용필씨와 첫 만남은 어땠나요?


케이맨 91년도에 가라오케 하던 형들 따라 가서 처음 뵀는데. 그 때 제 나이가 26살이었어요. 조용필 형님은 그냥 뭐 ‘하늘’이었죠. 저랑 17살이 차이 나니까.


드러밍엔 만족하시던가요?


케이맨 그냥 본인 노래하기 편한 정도로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93년도에 밴드가 깨지고 구하는 과정에서 저와 키보디스트 둘만 남으라 하셨는데. 진주 사람들 또 의리 있잖아요(웃음). 안 한다 그러고 나온 거예요.


이후 다시 들어가신 거죠?


케이맨 네, 2004년도에. 중간에 2~3차례 러브콜이 있긴 했는데, 저도 나름 바쁘게 활동하고 있던 터라. 2003년도에 세 번째 러브콜이 왔을 때 ‘지금 안 가면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합류한 거예요. 그것도 벌써 12년 전 얘기네요.


곁에서 본 조용필은 어떤 사람인가요?


케이맨 완벽한 삶을 추구하시는 분?


음악 외 ‘인생’도 완벽하게?


케이맨 일단 뭐든지 ‘음악’이니까요. 요즘 가수들이 연습을 안 하잖아요. 과거 잘 나가던, 이름은 못 밝히겠는데, 그 사람들도 옛날엔 찰랑찰랑 했지만 지금은 완전 갔거든요. 조용필 형님은 지금도 매일 연습해요. 몇 시간씩.


새 앨범 얘기 좀 하겠습니다. 어떻게 나오게 된 겁니까?


케이맨 음반 쪽으로 손을 댄 건 지금부터 7년 정도 됐는데. 처남이 노래를 했어요. 그러니까 조관우씨 외사촌. 조통달 명인의 조카죠. 저희 장모님께서 조명인의 여동생이시거든요. 한때 조관우씨가 키워주려고 하다가 잘 안 됐고, 7년 전에 저한테 전화가 와서 마지막으로 앨범을 한 장 내고 싶대요. 무슨 앨범, 했더니 트로트 앨범을 내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 내가 내줄 순 있는데 다른 기획사처럼 빵빵하게는 못 밀어준다, 대신 힘닿는 데까진 홍보를 해주겠다, 클럽 무명 가수보단 나을 거니까 열심히 해봐라. 그렇게 제작자로 시작했어요. 오유비라고, 음원 사이트에 검색해보면 나올 거예요. 《전국노래자랑》, 《도전1000곡》, 《가요무대》, 라디오 할 것 없이 다니며 홍보를 했는데, 이게 트로트 앨범을 들고 다니니까 PD들이 아는 척을 안 하더라구요.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2013년도에 기존과 다른 느낌으로 처남 앨범을 만들어줬는데, 이름도 오유비가 아닌 원가호라는 본명으로 갔어요. 그러면서 인지도를 올려보려 한 거죠.


제 생각엔 처음부터 ‘김선중’이라는 이름을 강조해 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인지도가 훨씬 있으시니까.


케이맨 당시에는 내 이름으로 낸다고 생각 안 했죠. 처남 걸 내준다고 생각한 거니까. 그런데 처남이 개인 사정으로, 지난해에 통보하듯 그만 둔다고 하더라구요. 조금 서운했죠. 그 동안 투자하고 뿌린 게 얼만데. 지금도 마음을 많이 풀었다곤 해도 좀 쌓여있어요. 「I’ll be there」라는 곡도 박상민씨가 하기로 한 건데 녹음 전날 매니저가 전화 와서 못 하겠다 하더라고요. 랩퍼도 다 잡아놨고, 코러스와 녹음실 일정을 전날에 캔슬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 그래서 막무가내로 제가 부른 거예요.



정규앨범 타이틀곡 「I'll Be There」 M/V


원래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에 관심이 있었나요?


케이맨 아니에요. 프로듀싱을 잘 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는데, 회사가 그리 크지 않고, 제작을 하다 보니 작사, 작곡, 편곡, 녹음실 잡는 일까지 제가 다 하게 된 겁니다. 엔지니어와 상의해서 소리 잡고, 프로듀싱 개념으로 다 해버린 거죠. 처음엔 노래 소리만 크기도 했고(웃음). 주위에선 드럼에만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냐 하는데, 전 사실 드럼에 제일 신경을 안 쓰거든요. 그냥 심플하게.


「땡땡이」 프리 솔로는 심플하지 않던데요(웃음).


케이맨 아, 그건 나름 드러머니까 내가 만든 노래에, 세상에 없는 음악을 한 번 만들어보자 해서 솔로를 입혀본 거죠. 세션 가서 남 노래 하는데 그러면 욕먹어요(웃음).


드럼 솔로 앨범은 내실 생각이 없으신지?


케이맨 사실 드럼 앨범을 내면 우리 식구들에게만 줘야죠. 게다가 고난도의 코드웍 없인 그런 연주 앨범은 못 만들어요.


욕심이 없으신 건가요?


케이맨 네, 그런 욕심은 없어요. 인터넷만 봐도 저보다 잘 치는 드러머들 너무 많잖아요. 사람들은 그런 연주자들 드럼 솔로 앨범을 듣겠지, 제 거 듣겠어요. 모르지, 큰 기획사에서 앨범 내주고 프로모션까지 다 해준다면야 몰라도.


그런 제안이 없었나요?


케이맨 연주곡 앨범에 그렇게 투자하는 곳은 없죠.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의 컨셉이랄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케이맨 일단 많은 분들이 들어줬으면 좋겠구요. 음반 시장이 없고, 그나마 있는 음원 시장도 ‘되는 사람들’ 빼곤 없는 식이어서. 큰 바람은 없어요 사실. 그저 내 나이 또래 아빠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생각, 아빠의 잔소리?(웃음) 일종의 인성교육이랄까. 그게 컨셉이라면 컨셉이겠네요.


타겟을 부모층으로 잡아도 괜찮겠는데요?


케이맨 실제 행사를 다니면서 보면 부모님들이 좋아하시더라구요. 사실 안 좋은 노래는 없잖아요. 얼마나 알려지느냐가 문제지. 최대한 노력을 하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죠.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


고향이 같아 선중 형님과 ‘형, 동생’을 먹었는데 이 날 인터뷰 마지막에 형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원가 100원짜리 볼펜을 만들면 돈을 못 벌더라도 원가 100원은 나와야 하는데, 앨범 한 장 내려고 1,000만원 들이면 한 달에 4만원 벌기가 힘들다는, 그래도 앨범은 계속 해나갈 거라는 얘기였다. ‘한류’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방송되고 있는 《뮤직뱅크》 시청률이 1.5%를 밑도는 지금, 10년 후엔 아이들이 적어져 아이돌이 힘들어질 거라는 형님의 예상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러다 보면 ‘성인 시장’이 살 것이고, 시장 판도는 그런 식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수요가 없으면 수십억 쏟아 붓는 아이돌도 어쩔 수 없는 시장이 될 거라는 그 말. 이 바닥 ‘30년 짬밥’에서 나온 조용한 일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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