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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魔王 #1] 아티스트 이상의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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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정보

향년 마흔여섯 살에 숨을 거둔 신해철의 장례식은 오일장으로 치러졌다. 유족들은 팬들을 아꼈던 고인의 마음을 헤아려 매일 조문을 받았다. 음악계 종사자는 물론 대중음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들의 화환이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그 중에는 권양숙 여사와 MBC 100분 토론팀, SBS 라디오 피디 일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빈소 맨 앞에는 조용필의 화환이 놓여 있었다. 가장 사랑하는 후배의 장례식장에 화환을 보낸 조용필의 가슴은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 못지 않게 찢어졌을 것이다. 조문객의 행렬은 좀처럼 끊어질 것 같지 않았다. 쓰러진 거목을 추모하는 모습은 슬픔을 넘어 경이로웠다.



과연 신해철은 어떤 아티스트였는가? 그의 부음을 전하는 뉴스 중에는 “천재 뮤지션이 죽었다”는 표현이 있었다. 만약 생전의 신해철이 이 말을 들었다면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그는 단연 뛰어난 아티스트지만 천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재능이 아주 많았고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작사, 작곡, 프로듀싱 실력은 당대의 누구보다도 빼어났다. 논란은 많았지만 표현력 강한 보컬리스트였고 기타도 상당히 잘 쳤다. 음향 엔지니어링과 컴퓨팅도 할 줄 알았고 회사를 꾸려 매니지먼트도 했다. 다른 종류의 재능도 많았다. 그는 말도 잘 하고 글도 잘 썼다. ≪안녕 프란체스카≫(2005)에서는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배역을 맡아 훌륭하게 해치웠다. 풍부한 재능과 강한 의지를 타고났으며, 재능을 펼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는 단연코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십 여 년에 걸쳐 신해철의 음악을 듣고 대중적 행보를 지켜본 입장에서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솔직히 예상을 뛰어넘는다. 단지 그가 솔로 앨범 활동을 앞둔 40대 아티스트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음악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 아쉬움은 인간 신해철, 거친 세상에 맞서 포효하길 거부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드라마틱한 인생에 대한 것이다. 신해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에게는 아티스트 이상의 그 무엇이 분명 있었다.



너의 시작은 아이돌이었으나 끝은 락스타일지니라



신해철에 대한 단골 우스개 소리 중 하나는 '오리지날 원조 아이돌'이라는 말이다. 무한궤도를 시작했던 신해철은 당시 서강대 철학과에 다니던 샤프하게 잘 생긴 청년이었다. 대학가요제 이후 무한궤도가 해체되면서 그는 밴드를 하고 싶어했지만 소속사와의 문제로 솔로 활동을 해야 했다. 아이돌로 지명도가 올라가면 음악 활동이 쉬울 것 같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신해철이 솔로 활동을 답답해하던 무렵 015B는 차근차근 자기 영역을 확대하면서 슈퍼 밴드의 기반을 닦고 있었다. 대마초 혐의 구속과 의가사 제대를 겪고 뒤에야 비로소 신해철은 락 밴드 N.EX.T를 결성하여 자신이 원하던 영토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의 음악 인생을 논할 때 짚고 넘어가야 할 중대한 지점이 있다. 그의 음악 활동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솔로 가수 시절은 흑역사로 기억됐고, N.EX.T도 수 차례 라인업이 바뀌고 해산과 재결성을 거듭했다. 활동 내내 신해철은 밴드와 솔로를 오갔다. 그는 음악적 고민을 숨기지 않고 앨범 색깔의 혼재성과 독자 프로젝트로 표현했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그에게는 밴드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다. 그 갈망은 일렉트로니카 솔로 프로젝트, 전상일 아티스트를 통한 화려한 앨범 아트워크, 문학성 갖춘 가사 등등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이걸로도 모자랐다. 그는 늘 뭔가 말하고 싶어했다.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 있었다. 그는 할 말이 아주 많은 남자였다.



N.EX.T는 빙하기의 공룡이었나


‘새로운 실험 집단’의 약자로 이름지어진 밴드 N.EX.T는 총 일곱 장의 정규앨범을 냈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새겨진 N.EX.T의 모습은 세 장의 앨범을 통해 구축됐다. 『The Return Of N.Ex.T Part 1 : The Being』(1994) 과 『The Return Of N.Ex.T Part 2 : The World』(1995) 그리고 『Lazenca : A Space Rock Opera』(1997) 이다. 일부 팬들은 이 세 장의 앨범을 애정을 담아 『존재』, 『세계』, 『라젠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97년 『라젠카』를 끝으로 N.EX.T는 해산했다.


그때 신해철은 해산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N.EX.T는 빙하기를 맞은 공룡과 같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 멘트만 보면 오만하게 들리지만 ‘새로운 실험 집단’에 쏟아부은 그의 노력을 아는 팬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해철은 자신의 20대를 밴드 N.EX.T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밴드를 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솔로 활동을 했고 대마초 구속으로 그동안 해온 고생이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직전 밴드를 결성하는 과감한 배팅을 했다. 3인조 구성이 위기에 놓이자 틀을 완전히 바꿔 4인조 구성에 나섰다. 밴드 구성과 앨범 작업이 거의 동시에 이뤄지다시피 한 『존재』가 성공을 거두자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음향과 녹음과 연주 능력을 한층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에 투자했다. 그 결과물인 『월드』는 그야말로 월드 클래스였다. 『Home』(1992)에서 『라젠카』에 이르는 그의 행보는 놀랍고 아슬아슬했으며 일생을 건 명승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신해철은 그 승부에서 모두 이겼다.



N.EX.T가 내놓은 음악적 성과물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신해철의 팬들은 한 장 한 장의 앨범이 돌덩어리처럼 딱딱하게 굳은 한국의 음악 산업과 싸워 얻은 결과물이라는 걸 잘 안다. 악기가 없으면 악기를 샀고 사람이 없으면 해외에서 사람을 찾아 왔고 컴퓨팅이 안 되면 전화번호부만한 원서 매뉴얼을 펴들었다. 그래도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욕을 하면 마이크를 들었다. 그는 말하고 싶어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얼마나 이걸 원하는지, 그리고 이 방만하고 야심 없는 한국 사회가 얼마나 무관심한지... 그는 시스템이 실종된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홀로 몸부림치며 믿어지지 않는 성과를 내놓았다. 그러자 마치 기적처럼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해산 무렵 신해철은 빙하기가 오고 있다고 판단했다. 음반 판매와 공연으로 이루어진 대중음악 시장에 거대한 변화가 다가오고 있으며 그 와중에서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이 음악을 접게 되리라고. 그래도 음악을 하고 싶다면 빙하기에 적응해야만 했다. 아마도 N.EX.T의 멤버들도 비슷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신해철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여기까지였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수놓았던 밴드 활동과 반짝이는 솔로 프로젝트,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의 영광을 가능케 했던 《음악도시》 진행을 마치고 신해철은 영국 유학을 갔다. (그리고 비싼 파운드화 때문에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다...고 두고두고 개그를 쳤다.)



2000년대 한국에서 가장 다정했던 사람, 신해철


신해철은 라디오 디제이가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경제적인 안정도 보장되었지만 그는 돈을 떠나 말하기를 좋아했다. 개그도 잘 쳤고(가끔 경고도 먹었지만) 청취자가 보낸 편지도 멋진 저음의 목소리로 읽어줬다. 후배 뮤지션을 슬슬 갈궈대며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재미있었다. (주로 유희열이 희생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어렵고 난감한 상황에 적절한 조언을 건넬 줄 알았다. 실제 여부를 떠나 신해철은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상황을 기꺼이 허락했다.



그의 조언을 요약하자면 대부분 다음과 같았다. ‘그건 네 책임이 아니야. 그러나 그걸 헤쳐나갈 힘은 네 자신에서 찾아야 돼.’라고. 그는 철학과 출신답게 논리 정연했고 종교학 전공답게 논리의 허점을 감성과 공감으로 메울 줄 알았다. 너무 억울한 나머지 말이 목구멍에 엉켜 내뱉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명확했다. 이런 재능은 음악인의 것이 아니라 종교인이나 정치인의 것이다. 우연히도 신해철은 음악적 재능 못지 않게 그 재능도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한 트위터리안이 이렇게 썼다. “내 부모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처음으로 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마왕 신해철이었다.” 이 말은 참척을 당한 조용필의 화환 다음으로 내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그는 슬픔에 찬 누군가를 못 본 척 하는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가가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로 입을 손해는 계산하지 않았다. 이보다 그가 착하고, 단순하고, 상냥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또 있을까.


2000년대는 이 용감한 사람에게도 쉽지 않았다. 밴드 비트겐슈타인은 N.EX.T의 영광을 뛰어넘는 새로운 경지를 밀어 젖혔다. 하지만 그 이상의 밴드 활동은 매끄럽지 못했다. N.EX.T와 비트겐슈타인의 멤버를 합쳐 재결성한 발표한 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3 : 개한민국』(2004)은 반응이 좋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 식의 변칙적인 멜로디와 N.EX.T의 촘촘하게 짜여진 사운드는 상호 조화에 실패했다. 2000년대 그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음악이 아니라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스테이션》 진행이었다. 공중파 방송사를 옮겨다니며 새벽 시간을 장악한 이 프로그램은 한동안 ‘개한민국’의 아웃사이더들이 모여들어 온갖 사연을 푸는 메카였다. 울고 불고 웃다가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이 프로그램은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유령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안식처였다. 신해철은 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아버지를 자처했다. 그럴 수 밖에 없던 것이, 2000년대는 상상보다 훨씬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이라크 전쟁 파병과 한미 FTA로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러니 노무현을 공개 지지했던 신해철은, 이 마음씨 곱고 착한 사람은 시대가 버린 아이들을 주워서 몸소 보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 그는 진짜 아빠가 됐다. 팬들은 한시름 놓았다.



Reboot Ourselves


그의 수많은 업적들 중 자잘한 것을 나열해 보자. 일단 한국에 일렉트로니카가 자리잡기까지 신해철의 공로는 작지 않다. 꾸준한 시도 끝에 국악과 일렉트로니카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고, 밴드의 로고부터 아트워크, 사진집과 공연까지 일관된 이미지를 구축하는 작업도 했다. 그와 일한 뮤지션들은 한국 대중음악계를 떠받치는 인재로 성장했다. N.EX.T의 라이브 앨범은 공연의 생생한 음질이 그대로 전해지는 사실상 한국 최초의 앨범이었다. 잘 나가든 못 나가든 신해철의 주변에는 늘 선후배 음악인들이 함께 있었다. 그를 통해 대중음악인들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2010년대로 넘어왔지만 한국 대중음악계는 여전히 힘겨웠다. 몇몇 음악인이 세상을 떠났고, 그와 활동을 같이했던 음악인들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음악 활동의 기반을 유지했다. 따지고 보면 제일 웃기고 재미있는 사람은 바로 신해철이었는데 말이다! 음악 활동의 물적 토대만 바뀐 게 아니었다. 2010년대 이후 대중음악의 흐름 중 하나는 단순화였다. 악기가 적어지고 보컬이 강조되고 사운드는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이제까지 그가 구축해온 스타일과 많이 달랐다. 꽉 짜여진 구조와 풍부하다 못해 빽빽한 사운드는 그가 음악을 통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2010년대는 빡빡한 사운드의 시대가 아니었다.


신해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앨범의 제목을 『Reboot Myself』로 지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죽음을 신의 실수로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슬픔도 상실도 아닌 ‘리부트’로 기억되길 희망한다. 「A.D.D.a.」뮤직비디오에서 그는 후덕하고 능글능글한 아저씨로 나타나 신나게 논다. 아, 우리는 정말 그와 좀더 오랫동안 재미있게 놀고 싶었다. 낄낄거리면서 서로를 붙잡아주고 싶었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해왔던 모든 작업들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이 재난같은 세상에서 멀쩡한 정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음악과 농담과 위로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따뜻하고 용감했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야만과 죽음의 시대를 무사히 통과할 때까지 그와 함께 한 시간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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