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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魔王 #24] 한계의 고통과 투쟁을 온 몸으로 보여준 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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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정보

신해철은 무한궤도로 화려하게 데뷔 했을 때나 솔로로 활동하던 시절, 항상 영미 대중음악의 트랜드를 정확히 짚고 있는 아티스트였다. 록을 기반으로 하는 아티스트 임에도, 뉴 잭 스윙과 랩뮤직의 부흥을 자기 음악 안으로 가져 올 수 있는 기민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디지털 장비에도 빠르게 적응해 한국에서 시퀀서를 능란하게 사용한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덕분에 신해철은 데뷔 초기부터 리듬에서 멜로디까지 녹음 작업 전반을 통제할 수 있었다. 적어도 넥스트 1집까지만 해도 트랜드에 대한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즉, 신해철은 1980년대 후반 디지털 장비가 대거 쏟아지던 시절, 기술이 대중음악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를 자신의 음악으로 환원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음덕의 징후

신해철은 어째서 음향 장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그의 음악 취향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해철은 성시완이 진행하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애청자로 EL&P, Pink Floyd, Procol Harum, Yes, Asia같은 프로그레시브 록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 흔적은 무한궤도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1989) 앨범 B면에 자리한 「슬퍼하는 모든 이를 위해」와 「끝을 향하여」에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다. EL&P를 필두로 한 이들 장르의 특징은 당대의 첨단 음향 장비와 악기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이를 통해 만든 전위적이고 창조적인 “소리”의 향연에 있다. 아날로그 시퀀서인 무그(moog)에서 신디사이저와 디지털 시퀀서를 가장 먼저 대중음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집단이 바로 이들이었다. 프로그레시브 록을 동경하고, 이들의 “소리”에 반하며 성장한 신해철이 새로운 음향 장비와 새로운 사운드 메이킹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년 시절의 우상, EL&P

흥미로운 것은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대중음악의 지구적 흐름에 여유롭게 편입하던 (이는 당대 한국 대중음악가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것이기도 하다.) 그가 넥스트의 『The Return Of N.Ex.T Part 1 : The Being』에 이르러 철저하게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1994년은 시애틀 그런지가 세계시장을 완벽하게 집어삼킨 시점이자, 뉴 잭 스윙을 지나 본격적인 힙합이 미국 대중음악의 주류로 나서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 작품의 시작을 알리는 「The return of N.EX.T」, 「껍질의 파괴」, 「이중인격자」의 3연타는 1990년대에 목을 매던 전작들과 달리 전형적인 1980년대식 헤비메탈로 점철되어 있다. Don Airey가 관여했던 M.S.G, Ozzy Osbourne, Thin Lizzy로부터 Asia까지 넘보는 웅장한 키보드 플레이, Metallica로 대표되는 쓰래시 메탈의 기타 리프, 육중한 코러스와 고음에 대한 집착까지 진짜배기 헤비메탈에 대한 욕망이 여기저기서 넘실댄다. 1992년, Dream Theater의 『Images and Words』가 발표(국내에는 다소 늦게 발매)된다. 이 앨범에 대한 해외 평단의 평가는 “Yes를 연주하는 Metallica”였다. 신해철 역시 이 작품에 한 방 맞은 기분이었으리라. Dream Theater는 그런지 시대의 한복판을 1980년대 테크니컬한 헤비메탈 연주자들이 꿈에 그리던 연주의 모든 것을 꾹꾹 눌러 담으며 통과하고 있었다.


EL&P로부터 Dream Theater에 이르는 사운드에 대한 동경, 1990년대 초반 크래쉬, 블랙홀, 다운타운 등의 밴드가 이뤄낸 한국 헤비메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며 신해철은 자신의 거꾸로 가는 음악시계를 본격적으로 주조하기 시작한다. 그 첫 작업은 김세황(기타/보컬), 김영석(베이스/보컬), 이수용(드럼)이라는 멤버로 넥스트의 진용을 새롭게 꾸미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멤버들은 신해철이 꿈꾸던 사운드를 두 손과 발을 통해 직접 구현시켜줬다. 다운타운 활동을 통해 Joe Satriani에서 Steve Vai에 이르는 속주와 트레몰로 암을 강조한 연주, 랙 이펙터를 짊어지고 다닌 덕분에(?) 유려한 톤 감각을 선보인 바 있는 김세황의 가입은 그 중에서도 천군만마였다. 다운타운의 앨범에서도 확인할 수 있던 바, 김세황의 음악적 취향은 당대 한국 헤비메탈 기타리스트들처럼 정통파 헤비메탈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하드록에서 훵크, 쓰래쉬, 팝까지 다양한 장르를 능란하게 소화할 수 있던 김세황의 성향은 신해철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스튜디오 정규앨범, EP, 라이브 앨범까지 『The Return Of N.Ex.T Part 2 : World』(1995)와 『Lazenca : A Space Rock Opera』(1997) 사이의 행보는 가히 신해철이 꿈꾸던 프로그레시브 록, 헤비메탈, 훵크 록의 종합판을 천의무봉으로 얽어냈다.



진짜배기 헤비메탈!


신해철은 왜 이토록 복고적인 록/메탈 사운드에 목을 맸을까?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대고 싶다. 하나는 자신이 성장하며 들었던 음악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물리적 토대를 이룩했다는 자신감이다. 『Lazenca : A Space Rock Opera』는 IMF 직전, 한국 사회의 경제적 풍요가 극에 달했던 시기의 작품이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엄청난 물량이 쏟아졌고, 영국으로 믹싱과 마스터링을 보낼 수 있을 여유가 있었다. 연주 실력이나 사운드 메이킹에 있어서도 해외의 누구와 견줘도 모자라지 않았다. 이 얘기가 장르의 발상을 뒤엎는 전혀 새로운 작곡력과 연주력까지 담보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신해철이 헤비메탈에 대한 사운드적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여러 장르를 섞는 방식의 작곡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룩한 사운드의 성취는 한국 헤비메탈의 전성기라 간주하는 1980년대 그 어떤 밴드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의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1990년대 초, 중반을 벌어진 수많은 인재(人災) 속 나타나는 한국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넥스트가 최강의 사운드와 사회비판적 가사를 쏟아내던 시기에 한국은 사고공화국이었다(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서울 아현동과 대구 지하철 공사장의 가스 폭발, 서해 페리호 침몰과 아시아나 여객기의 추락,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가 이어졌다. 정치와 경제가 맞잡은 부정부패의 40년이 만들어낸 연이은 참사가 뉴스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루하루의 바쁜 삶에 쫓겨 제대로 분노할 새도 없이 일터를 지켜야 했다. 사회는 풍족해졌지만 무한경쟁 속에서 가족은 단절되었고, 종교는 타락했으며, 역사는 심판을 내리지 못했다. 이러한 사회에 직설적인 비판을 던지는 가사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음악이 무엇이겠는가? 프로그레시브 록은 이미 태동부터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었고, 헤비메탈은 “소리”의 경험을 통해 이를 표현해왔다. 극단적인 비판적 실험에 가까운 그라인드 코어(「나는 쓰레기야」)가 넥스트의 사운드 안으로 편입된 것 역시 이러한 심증을 뒷받침한다.


분노!


그러나 이 멤버는 오래가지 못했다. 빼어난 연주력만큼 각자의 취향과 지향점이 확실했던 멤버들은 놀라운 결과물을 쏟아내면서도 불안했고, 『Lazenca : A Space Rock Opera』를 끝으로 우선은 일단락 되었다. 이후 신해철은 다시 당대의 사운드라 할 인더스트리얼과 일렉트로니카를 다루는 솔로 아티스트로 돌아간다. 이후 재결성되는 넥스트는 인더스트리얼, 헤비메탈, 훵크 록, 특유의 팝 감각을 더 마구 버무리는 성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어떻게 보더라도 헤비메탈러 신해철은 완벽한 창조자는 아니다. 대신 그는 고도로 섬세한 귀를 가지고 있었고, 이 귀를 바탕으로 한 때 한국의 메탈러와 팬들이 꿈꾸던 사운드의 성취를 이뤄냈다. 그는 스스로를 냉철히 성찰할 수 있는 아티스트였고, 덕분에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선 장르 간 이종교배로 새로운 사운드 텍스처를 그려야만 한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느닷없지만 매번 감동적이었던 발라드의 존재, 「Komerican Blues」로 대표되는 훵크 메탈이 이러한 신해철의 성찰을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잘 아는 것과 한계를 극복하고 완벽한 자기 세계를 이룩하는 것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신해철은 그래서 괴로워했고, 동시에 잘 할 수 있는 것을 통해 관객과 자신 모두 충분히 즐거워 할 수 있었다.


꿈꾸던 사운드를 성취한 그 때

신해철을 떠나보내며 가슴이 아픈 것은 그가 우리 시대에 스스로를 성찰하는, 그래서 즐거움과 성취, 그리고 한계의 고통과 투쟁을 온 몸으로 보여준 록커이자 아티스트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시도해 볼 수 있던 풍요의 시대를 살았고, 덕분에 우리는 그를 보내며 그가 들려주는 과잉의 사운드와 메시지를 곱씹어볼 수 있다. 고맙다. 경의를 표함에 아쉬움이 없는 음악 인생을 들려준 아티스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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