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은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리채 (Lee-tzsche) 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한 이상은과 국제적인 아티스트를 내세우겠다는 일본의 자본, 그리고 아시아의 음악에 흥미를 느끼던 Richard Niles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앨범이었다. 코스모폴리탄을 지향하는 뮤지션이 자신의 자의식을 본격적으로 펼쳐 보였다는 점에서 이 앨범은 지극히 90년대가 낳은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이 앨범의 정체성은 6집 『공무도하가』만큼이나 복잡다단하다. 기본적으로 포크 록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현악 세션 위주로 마이너 코드들을 수놓은 곡들, 90년대 브릿팝이나 얼터너티브 록의 영향 하에 있는 곡들, 스탠다드 재즈의 성격을 지닌 곡들, 「Eternity」나「Breeze」처럼 동양의 소재를 취하는 곡들이 이 앨범에 한꺼번에 깃들어 있다.

Richard Niles의 프로듀싱은 타케다 하지무의 편곡과 그럴듯 하게 엮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Richard Niles가 참여한 「Actully, Finally」가 이 앨범의 전체적인 기조에 걸맞지 않은 결과물이라는 데에 있다. 현악 세션과 재즈 피아노를 내세워 작업한 「Release Your Mind」와 달리, 「Actully, Finally」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트랙들의 마이너 코드 기조에 비해 훨씬 메이저한 편곡을 채택했다. 서두에 등장하는 코러스, 본래 멜로디보다 더욱 밝은 어조의 기타, 중반부에 등장하는 이펙터 같은 방식들이 앨범에서 가장 밝은 어조의 곡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타케다 하지무가 편곡한 원곡과 곡의 전체적인 무드와 내용은 사실상 뒤로 이어지는 트랙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곧이어 나오는 「House」부터 차츰 안정적인 영역에 들어선다. 7집 전에 데모를 영어로 먼저 만들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 곡들은 사실상 7집의 원형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앨범에 등장하는 영어 원곡들은 7집과는 다른 결을 제시한다. 전작이 로우파이의 메마른 톤을 통해 황폐함이라는 테마를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이 앨범은 분열적인 성격 자체를 섬세하게 파고들기 때문이다. 특히나 「A Try-On」과 7집의 「비가」를 비교해보면, 영어 가사의 섬세하고 예리한 디테일이 치명적이고 비범한 표현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앨범은 바로 이러한 섬세한 분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데에 주력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곡 또한(타이틀곡과 마찬가지로) 전반부의 연장선상에서 배태된 곡들이다. 시니컬에 중점을 둔 곡들이(「Boiled Egg」, 「Broken Pearl」)와 섬세한 표현을 앞장세운 곡들과 (「Eternity」, 「Breeze」, 「Release Your Mind」) 무리 없이 한데 엮이고 있다. 분열이라는 테마가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면서 한데 아우러진 것이다.
 
앨범은 생각보다 복잡다단한 층위들을 무난히 잘 아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리채의 탄생은 꽤 그럴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과거의 영토와 결별을 선언한 무국적자가 신중한 모습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이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