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의 인트로를 장식하는 기타는 브릿지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같은 자리로 불쑥 들어와 훅의 감정과 공간감을 강조하며 묘한 잔상을 남긴다. 보컬 멜로디를 받쳐주는 편곡 또한 멜로디와 1대 1로 대응하지 않는다. 일견 헐겁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보다 자유롭고 아름답다. 기타 멜로디의 뜬금없는 삽입이 외려 멜로디의 무드를 자연스레 돋궈준다.
 
이상은은 이 앨범의 테마를 자신의 유년과 유년에서 파생된 내면으로 한정짓는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소재를 편곡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결과적으로 앨범에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앨범의 테마가 다소 자유분방한 편곡을 고정시켜주는 고정 핀의 역할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자유분방함이 결코 산만함으로 비춰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기차여행」의 드럼을 배재한 편곡은 여행의 설렘과 가벼움을 은은하게 돋궈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뜬금없는 기타의 아르페지오로 시작하는 「무지개」의 인트로는 무지개가 지니는 특성을 제법 근사하게 구현한다.「들꽃」의 소박한 편곡은 상대적으로 센 멜로디와 목소리에 적절한 균형감과 통일감을 선사한다.
 
신시사이저와 오르간 소스를 중심악기로 삼은  「1985」는 가사가 주는 은은한 무게감을 적절한 온도에서 다룬다. 14집에서 드러났던 괴리감이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곡에 스며든다. 스스로 편곡의 중심을 다 잡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물이 가능했으리라. 10집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온 곡과 말의 괴리감은, 이 앨범에서 다소 해소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앨범의 가장 큰 장점은 그러한 적절함이 균등한 수준에서 골고루 배열되어있다는 점에 있다. 어느 편곡도 곡의 멜로디를 넘어서지 않고, 곡의 무드를 곡해하지도 않는다. 멜로디와 주제는 소박하지만, 그 점은 가벼우면서도 흥미로운 편곡 방식에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아홉 곡에 불과한 수록곡 또한 이러한 적절함을 돋궈주는 역할로 작용한다. 소박하지만 나태하지 않다. 가볍지만 진지하다. 헐겁지만 나름의 긴장감 또한 획득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반응이 기존의 앨범들에 비해 즉물적으로 와닿는 게 경이롭다. 이는 앨범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연주곡인 「초여름」 또한 마찬가지다. 기타 주법의 전환과 각종 퍼커션 소스의 조합으로 이뤄진 편곡은 초여름의 다채로움을 자유분방하고 즐거운 필치로 그려낸다.
 
이상은은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본래 목소리가 이러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넌지시 암시한다.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보다 분명히 한다. 어지간한 내공과 배짱이 없이는 불가능한 실천을 이상은은 감히 해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힘든 시대에 자신만의 텃밭을 애써가며 일구는 일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자기 자신이 이미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 앨범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더욱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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