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Review

오늘 다시 들을 수 있음에 행복하다

박지윤 (Park Jiyoon) 『9』
1,585 /
음악 정보
발표시기 2017.03
Volume 9
레이블 박지윤크리에이티브
공식사이트 [Click]

“그 작은 기억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빛이 되어 음악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돌아보면 좋은 기억과 아픈 기억, 슬픔과 행복의 기억들이 모두 의미가 되어 나를 찾아온다.”


본인이 스스로 뱉은 이 말이야말로 7, 8, 9집에 관한 가장 명쾌한 해설이다. 여기에 ‘계절’이라는 단어 하나만 더 붙이면 박지윤의 앨범 3장은 하나의 여정이 된다. 2009년 『꽃, 다시 첫 번째』의 첫 곡 「봄, 여름 그 사이」의 첫 마디 “빛 나무 빛 그림자 사이”부터 그는 시종일관 사랑을 노래해왔다(윤종신 얘기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찰나의 빛이 깨워주는 기억들이며, 때문에 그 빛이 찾아온 계절을 더 감각하게 해주고, 슬픔과 행복의 기억들이 시차 없이 뒤섞여 양가적인 감정에 잠기는 일이었다. 그 잠김의 눈금들을 박지윤은 8년 동안 여러 가지 모양의 노래로 만들어왔다. 그의 노래를 아끼고 이끌어주는 뮤지션들과 함께 더 나은 모양을 만들고자 했다.


그가 자작한 곡만을 놓고 봤을 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속해 있던 『꽃, 다시 첫 번째』의 빛과 찰나와 기억은 『나무가 되는 꿈』(2012)에 이르러 타인에게 직통의 감정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이번 9집에 마지막 곡으로 다시 실린 「오후」가 바로 그 곡이다. 즉각적인 소통의 측면에서 그의 7집 자작곡들은 용린과 루시드 폴의 곡을 따라오지 못했지만 다음 앨범에서는 그들만큼 친화력을 뽐냈다. 「오후」는 권순관의「나무가 되는 꿈」과 함께 8집에서 가장 달콤쌉싸름한 곡이었다. 이번에는 사정이 더 좋다. 2곡 빼고 모두 그의 곡이고 그의 곡들이 가장 좋다. 「사랑하고 있어」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에서 가장 먼저 귀에 잡히는 건 시도한 적 없는 리듬 프로그래밍이고, 때문에 그걸 만든 조정치와 이스트빔의 이름을 보게 되지만, 그 소리를 받아낸 박지윤의 곡이 무척 좋다는 게 무엇보다 앞서는 일이다.


그가 정말로 믿을만한 작곡가가 되었다는 건 소리를 많이 덜어내고 피아노와 베이스와 타악으로만 구성한 「기적」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연주에 결코 밀리지 않는 선율은 후반의 “흐르는 물이 되어서 차가운 세상을 견뎌요”에서 완전하게 주인공이 된다. 곡 자체의 반전뿐만 아니라 동시에 감정의 시야까지 넓혀주는 일, 사랑을 끝없이 어떤 이미지와 엮으려고 하는 8년의 노력이 바로 이런 노래를 만들어낸 것 아닐까? 박지윤은 이제 사랑에 관한 자기만의 형상화를 터득한 듯 보인다.


하지만 여럿의 협업 뮤지션들에게 둘러싸인 팝 가수 박지윤은 이번에도 두 가지 문제를 노출한다.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 부족함과 넘침이다. 「겨울이 온다」는 훌륭한 트랙이지만 그 순백의 차가움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누가 봐도 조윤성이다. 이 곡에서 박지윤은 용린에게 편곡을 기댔던 『꽃, 다시 첫 번째』처럼 자기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도움을 기다린다. 반대의 경우는 조금 더 심각하다.『나무가 되는 꿈』 때부터 발생한 넘침이 이번에도 반복되고 있다. 「그러지마요」와 「달이 피는 밤」과 「우리의 하루」에 꼭 4인조 스트링이 필요할까? 그냥 조정치의 기타 반주가 잘 들리도록 놔두었다면 「우리의 하루」는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나무가 되는 꿈』에서 불거진, 박지윤의 사랑 얘기에 남의 곡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문제도 역시 똑같이 반복된다. 곽진언과 김정아의 곡이 하나의 앨범 안에서 흘러가는 박지윤 특유의 호흡과 미묘하게 어그러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9집을 대표하는 노래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와 「기적」을 꼽고 싶다. 전자는 전자음악과 포스트 록을 빌려 시도한 적 없는 소리를 들려주고 후자는 8년 전의 「봄, 여름 그 사이」처럼 소편성으로 마음을 두드린다. 이 두 가지 방식을 따르는 곡들은 똑같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곡들 앞에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비록 자기 곡을 완숙하게 써내진 못했지만 『꽃, 다시 첫 번째』에서 박지윤은 자신이 간직한 찰나의 기억과 감정을 붙잡아 보여주었다. 그 알듯말듯한 소소함으로 가득했던 그때와 누구든 단박에 사로잡는 곡을 써내지만 이곳저곳에서 평범한 프로듀싱에 빠져버리는 지금 중 나에게 더 와 닿는 건 그때다. 곡 후반부에서 돌연 무겁게 달려드는 9집의 스트링 덩어리보다 챔버 팝처럼 흔들거리던 7집의 「4월 16일」이 더 좋다.


박지윤은 5년 전의 『나무가 되는 꿈』보다 더 나은 길을 찾았지만 그만큼 더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도 컸던 듯하다. 그의 CD 케이스는 8집과 9집을 거치며 점점 크고 무거워졌다. 얼굴 사진만 있던 8집에 비한다면 이번 9집에 실린 마흔 장이 넘는 그의 사진은 풍성한 상념을 유도한다. 하지만 여기저기 덧붙인 산문에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미 노랫말 속에 다 들어있는데 그 옆에 크게 다를 것 없는 사족을 너무 많이 붙여놓았다. 마음에 드는 건 맨 마지막의 후기뿐이다. 다음에는 뭔가를 더 덜어냈으면 좋겠다. 나도 한때는 그를 이상은과 이소라의 합체된 후예로 바라봤지만 그런 잣대는 이제 부질없다. 그저 「봄, 여름 그 사이」나 「오후」나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같은 노래들을 더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 아니, 더 많이 못 만들어도 상관없다. 지금 이 노래들을 차례로 꺼내 듣는 봄날이 그냥 좋다. 오늘 박지윤을 다시 들을 수 있음에 행복하다.

Credit

Produced by 박지윤
Vocal Recording by 김일호 at M Studio(Except Track 5, 9)
Mixed by 김일호
mastered by Stuart Hawkes at Metropolis Mastering Studios, UK
Photography, Text, Design 박지윤

Track List

  • No
    곡명
    작사
    작곡
    편곡
  • 1
    사랑하고 있어
    박지윤
    박지윤
    조정치
  • 2
    그러지마요
    박지윤
    박지윤
    임헌일
  • 3
    겨울이 온다
    박지윤
    박지윤
    조윤성, 박지윤
  • 4
    달이 피는 밤
    박지윤
    박지윤
    적재
  • 5
    기적
    박지윤
    박지윤
    조윤성, 박지윤
  • 6
    다른 사람 사랑할 준비를 해
    곽진언
    곽진언
    전진희
  • 7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박지윤
    박지윤
    임헌일, 박지윤, Eastbeam
  • 8
    우리의 하루
    김정아, 박지윤
    김정아
    조정치
  • 9
    O
    박지윤
    박지윤
    적재
  • 10
    오후(2017)
    박지윤
    박지윤
    조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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