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클리셰 만큼이나 창작자들을 골 아프게 하는 게 또 없다. 원인은 내·외부에 모두 존재한다. 외부적으로는 이미 존재하는 스타일이나 그 시점에서의 트렌드를 인식함으로써 그를 따라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따라간다면 그 안에서 자신만의 특색을 어떻게 드러낼지를 생각해야 한다. 반대로 따라가지 않는 경우에도 인지해버린 각종 스타일과 전반적인 음악계의 흐름을 머릿속에서 의도적으로 지우기는 어렵기에 그건 그것대로 머리가 아프다.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커리어에서 이전에 성공적으로 형성해놓은 스타일을 그대로 살릴 것이냐, 말 것이냐를 판단하게 된다. 어떤 경우든 타협점을 잘 찾아가면서 만들어간다면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럴 수 없기에 전자의 경우에는 ‘자기복제’라는 오명을 쓰게 되기도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정체성의 혼란’과 같은 타이틀을 달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커리어가 긴 아티스트의 디스코그라피를 살펴보면, 그 전형성이라는 기준에 맞춰 각 작품을 분류할 수도 있다.

얼마 전, 에픽하이(Epik High)와 가졌던 인터뷰에서 DJ 투컷(이하 투컷)은 “(신발장은) 에픽하이 시즌 2의 시작을 생각해요.”라는 말을 했다. 여덟 번째 정규 앨범이고, 그 사이에 수많은 형태로 발표한 기타 작품까지 합치면 발표한 작품이 10장을 훌쩍 넘음에도 그런 말을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발언은 『신발장』을 듣다 보면 아주 자연스레 이해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에픽하이의 음악’이라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그들이 만들어낸 전형을 잘 활용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2 MC 1 DJ라는 국내·외를 통틀어도 희귀한 구성을 한 이 팀은 11년의 활동 기간 속에서 수많은 전형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 전형은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으며, 에픽하이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전형이어서 그들의 음악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막을 올리며」는 1집의 「Go」, 『魂: Map The Soul』 (2009)의 「Believe」처럼 앨범의 포문을 여는 트랙인 것은 물론, 각 시기에 어울리는 어떤 각오나 포부, 소회를 담고 있다. 그에는 비장함, 혹은 당참이 있다. 타이틀곡인 「헤픈 엔딩」과 「스포일러」는 소품집 형태로 발표됐었던 『Lovescream』 (2008)이 표방하는 ‘에픽하이 식 감성 넘버’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여성 보컬(조원선)을 기용하거나 타블로가 직접 노래하는 후렴 구성 방식도 그 문법에 어느 정도는 부합한다. 이외에도 「부르즈 할리파」는 익숙한 이름들과 함께한 그간의 배틀랩 넘버들을, 「BORN HATER」는 「Eight By Eight」이나 「Rocksteady」같은 ‘단체곡 씻’을 생각나게 한다. 「또 싸워」, 「AMOR FATI」도 이전에 그들이 게스트(윤하, 김종완)들과 함께했던 노래 속 감성을 다시 고스란히 담고 있어 익숙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전형을 철저히 잘 따르기만 하는 경우는 ‘자기 복제’라는 오명을 쓰고 절하당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신발장』은 그 오명을 쓴 것인가? 정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앨범은 그들이 이전에 만들어둔 전형을 가짐과 동시에 새로운 요소들도 내포하고 있다. 프로듀서 진과 몇몇 참여진이 가장 그렇다. 태양, 빈지노, 비아이, 미노, 바비, 박재범의 참여는 시의성이 반영된 부분이기도 한데, 앨범 곳곳에서 각자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프로듀서 진은 참여진보다도 앨범에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타블로와 투컷이 앨범 프로덕션 전반에 걸쳐 참여한 건 이전과 다를 바가 없지만, 초이스37, PK, 피제이와 같은 프로듀서의 참여는 확실히 큰 변화다. 그 변화는 각 트랙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데, 초이스37이 참여한 「헤픈 엔딩」과 PK가 참여한 「스포일러」 둘 다 사운드의 입체감이 상당하다. 태양의 「눈, 코, 입」에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 로우 패스 필터 효과가 두 곡에 쓰여서 그렇다. 피제이의 경우에는 후반부에 배치된 「LESSON 5 (타임라인)」, 「LIFE IS GOOD」을 프로듀싱했는데, 피제이 특유의 샘플링 작법이 잘 드러난다. 「LIFE IS GOOD」은 샘플 톤, 박재범의 보컬이 레트로하면서도 마냥 레트로하지도 않아 아이러니한 매력이 있다. 물론, 타블로가 프로듀싱한 「부르즈 할리파」는 트랩 리듬을 활용했고, 투컷이 프로듀싱한 「BORN HATER」는 평소 투컷의 비트에 비해 드럼 톤이나 메인 악기가 프레쉬하다는 점도 있다. 그 둘 역시 전형을 지키면서도 그 속에서 시기적절한 변화를 줬다고 볼 수 있다.

고유의 문법을 유지하면서도 그 속에서 변화를 줘도 무리가 없을 부분에 변화를 준 것. 『신발장』은 그 점을 최대의 장점으로 가진다. 더 인상적인 지점이라면 그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 그렇게 하자는 의도가 있어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고 상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의도를 가지고 전형을 깨려 하면 앞서 말한 정체성의 혼란은 물론, ‘무리수’라 불릴 수도 있다. 에픽하이와 함께 2000년대 중, 후반에 큰 인기를 끌었던 다이나믹 듀오의 4집 앨범 『Last Days』 (2008)는 그에 대한 단적인 예다. 특히, 미쓰라는 작사나 랩이나 전체적으로 참여율이 저조하긴 해도 4, 5집에서 과도한 미사여구를 써가며 랩을 하는 면모를 더 버리고 부담을 내려놓고 편안한 상태로 자신의 벌스를 전개해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그렇게 미쓰라까지 동참한 ‘일상의 언어’를 활용한 『신발장』의 노래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면서도 진부하지 않으며, 이들이 더욱 단단해졌음을 드러내고 있다. (타블로와 미쓰라가 메기고 받는 방식으로 벌스를 구성함으로써 얻은 일체감도 그 단단하다는 인상에 한몫한다.) 이는 그들이 이번 앨범으로 차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게 순전히 그들의 소속사가 YG 엔터테인먼트라서만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들의 역사를 꾸준히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들의 디스코그라피는 어떤 아티스트의 디스코그라피보다도 고저가 심하다. 하지만 인생이 언제나 좋을 수만 없듯이 이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좋지 않은 상황에 놓일 때, 그대로 무너지지만 않으며,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들이 이번 앨범을 ‘에픽하이 시즌 2의 시작’이라고 판단한 것은 정확하며, 이 세 남자는 이번 앨범으로 자신들이 죽지 않았음을, 또 부활했음을 알렸다. 과연 90년대 생 랩 아티스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힙합 그룹 중 하나, 에픽하이다.